매일신문

[동해의 窓] 분월이개의 달빛

제주도 올레길로 가족체험을 다녀온 아이에게 솔직한 느낌을 물어보았다. 아이의 대답이 '우리 바다랑 마을이랑 똑같아요' 한마디였다. 호미곶 바닷길과 다르지 않았다는 반응이었다.

그 아이의 말끝에 며칠 전 달빛 내린 마을길에서 느꼈던 감동이 되살아났다. 처음에는 달빛이 바다 위로 흩어진다는 '분월이개'의 광경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교통표지판은 '분얼포'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분월이개라고 불렀다. 달빛이 바다 위로 흩어지는 포구라는 뜻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지명 정비랍시고 의미는 버리고 분얼포라고 갖다 붙인 모양이었다. '달빛이 흩어지는 포구' 낭만적인 이름을 듣고는 찾아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환한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분월이개로 나갔다. 그야말로 달빛이 교교히 바다 위를 흐르고 있었다. 이따금 방파제를 밀치는 파도 소리가 현실임을 알릴 뿐,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내친김에 분월이개를 올랐다. 그곳에서는 달빛과 바다의 어울림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흐르는 달빛을 따라서 대동배까지 넘어갔다. 대동배 바다는 아예 환하게 열려 있었다. 달빛은 거침없이 바다를 노랗게 칠하고, 흔들리는 잔물결은 마치 물고기 떼가 입을 벌려 달빛을 머금으려는 것 같았다. 바다에 손을 담그면 이내 온몸이 노랗게 젖을 것만 같았다.

대동배를 지나 학달비 고개에 접어들면서 또 다른 풍경이 연출되었다. 가장 먼저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었다. 바다에서 숲으로 순간 이동이 이루어진 느낌이었다. 등줄기에 오스스하게 이는 잔소름이 오히려 쾌감을 주었다. 나뭇가지, 가지에 얹히는 달빛이 투명하기만 했다.

오래전 한 외국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나라는 산천 자체가 아기자기하게 예쁜 것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 지역을 돌아다닐 때도 그런 사실을 실감한다. 해안의 모습은 더욱 그렇다. 일기 또한 변화무상하다. 특히 호미곶 해안을 걸을 때마다 다른 풍경, 다른 바람을 만난다. 그야말로 오늘은 어떤 모습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설렘으로 바닷길을 나서곤 한다.

우리 고장에도 제주도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에 버금가는 곳이 수없이 많다. 우리가 그 안에 살면서도 그냥 지나치기 때문에 놓치고 있을 뿐이다. 사랑은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고장 사랑 역시 멀고 어려운 게 아니다. 고장의 자연과 사람, 귓가를 스치는 바람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 그 시작일 것이다.

김 일 광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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