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포항은 바다를 터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엘도라도에서 제철과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소규모 어시장이었던 죽도시장은 동해안 최대 규모의 수산시장으로 확대됐다. 죽도시장에서 포스코, 구룡포로 가는 길은 포항 사람들의 달라진 삶의 궤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죽도시장 상인 이야기
승리식당 박옥수(66'여) 씨는 죽도시장의 1세대 상인이다. 죽도어시장협의회 초대 회장을 지낸 박 씨는 1970년대 초부터 장사를 시작했다. 상수도가 없어 사비로 지하수를 파고, 전기를 끌어다 쓰던 시절이었다. 위판장도 없어 고깃배에서 바로 활어를 구입해서 팔았다. 산소 공급기가 없던 시절이라 활어를 담은 대야의 물을 끊임없이 바가지로 퍼부어야 했다. "그때 시장은 '시베리아 벌판' 같았지. 허허벌판에 바닷바람을 온몸으로 맞았으니까." 상인도 30~40명에 불과했고 배도 10여 척이 전부였다. 대게를 잡아오면 살릴 수가 없어서 소금물에 담가뒀다가 팔았다. "전기가 없어서 전봇대 5개를 내 돈으로 사서 전기를 끌어왔어요. 당시 집 한 채 값이 500만원 정도였는데 전기 끌어오는 데 680만원이 들었으니까 엄청난 거죠."
수협 위판장에서 선어를 파는 김순자(55) 씨는 시어머니에 이어 2대째 장사를 하고 있다. 남편과 시동생, 동생은 중매인으로 인연을 맺었다. 김 씨의 하루는 오전 5시부터 시작된다. 오전 5시 30분부터 경매가 시작돼 3시간가량 이어지기 때문이다. 시동생과 동생이 낙찰받은 물건을 김 씨가 받아서 판매한다. "시장은 자기만 부지런하게 일하면 다 먹고살아요. 얼마를 벌든 열심히 몸을 놀리면 형편이 괜찮아요."
상인들은 예민하다. 이런저런 징크스나 금기도 많다. 우선 언론과 인터뷰를 꺼리는 이들이 많다. 인터뷰를 하고 나면 몸에 병이 온다는 속설 때문이다. 마수걸이 손님을 받기 전에 누가 와서 쓰지도 않은 비닐봉지를 가져간다거나 물을 한 바가지 퍼가거나 하면 그날 장사는 망친다는 믿음도 있다. 첫 손님이 와서 물건을 손으로 이리저리 만지고 그냥 가도 '재수가 없다'고 여긴다. 이런 일로 손님과 언성을 높이는 일도 왕왕 있다. 대신 첫 손님이 와서 에누리없이 쉽게 팔면 그날은 운이 좋다고 믿는다. "시장에는 원산지 표시가 잘 안 되잖아요. 고등어도 중국산과 국산을 섞어서 파는 상인들도 간혹 있고요. 육안으로는 구분이 안 되거든요. 너무 싼 물건만 찾지 마시고 적당한 값을 치르고 사는 게 좋아요. 싼 물건은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포항의 현대사를 되짚어가다
포스코역사관은 포항 중앙상가 건너편에서 102번을 타고 포스코 동촌생활관 앞에서 내리면 된다. 20분 정도 걸린다. 역사관에는 철기 문명부터 포스코 창업기와 건설기, 광양제철소 건설기, 포스코의 현재까지 연대별로 전시돼 있다. 1968년 4월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고, 건설 현장 본부였던 '롬멜하우스'가 당시 모습 그대로 전시돼 있다. 포항제철소 1기 착공식과 첫 출선 모습, 당시 사용했던 물품 등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박태준 초대 회장의 친필과 유품이 전시돼 있는데 글씨가 참 정갈하다. 포스코역사관을 찾는 이들은 하루 평균 300~400명에 이른다.
포스코역사관 앞에서 200번을 타고 25분 정도 달리면 구룡포항이다. 구룡포에서 유명한 모리국수로 끼니를 때웠다. 모리국수는 각종 해물과 물고기를 넣고 얼큰하게 끓인 국수다. 매일 오전 어시장에서 사온 싱싱한 해산물을 넣고 끓인다. 이날은 아귀와 물메기를 넣고 끓인 국물이었다. 매콤하고 짭짤한 국물이 목 안으로 넘어왔다. 묵은 김치도 꽤 맛깔 난다.
구룡포 아라광장 건너편에는 300여m가량 이어지는 구룡포근대문화역사거리가 있다. 일본인들이 구룡포에 들어온 건 100여 년 전이다. 가가와현의 고깃배들은 고등어를 쫓아 구룡포로 들어왔다. 이후 고등어 어업의 근거지가 되면서 대거 구룡포로 이주했다. 1932년에는 그 수가 287가구 1천161명이 이르렀을 정도였다. 현재의 근대문화역사거리는 음식점과 제과점, 어구류 판매점, 술집, 백화점 등이 들어선 번화가였다. 선박 경영과 선박운반업, 통조림 가공공장 등으로 부유해진 일본인들은 집을 지었고 일본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현재 500여m의 거리에 80여 채의 가옥이 남아있다.
'호호면옥' 간판이 붙은 건물은 당시 구룡포에서 으뜸가는 숙박시설인 '대등여관'이었다. 일본식 찻집이 들어선 '후루사토'는 80년 전의 요릿집 '일심정'이다. 후루사토를 지나 왼편으로 구룡포공원으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공원에 올라가면 구룡포 앞바다와 일본인 가옥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구룡포 근대역사관 건물은 1920년대 가가와현에서 온 하시모토 젠기치가 지은 집이다. 아기자기한 정원과 일본식 다다미를 품은 전형적인 일본식 집이다. 내부는 100년 전 일본 어부들이 구룡포에 정착하게 된 상황과 당시의 생활상을 볼 수 있게 꾸며져 있다. 당시 구룡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하시모토 젠기치와 도가와야 스브로를 중심으로 건설업과 어업 등에 종사하며 살았다. 구룡포 공원에는 도가와야 스브로 공덕비가 있다. 구룡포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며 일본에서 규화석을 갖고 와 세웠는데 광복이 되면서 주민들이 시멘트를 발라 글씨를 지웠다.
◆"잘 가라고 손 흔들어줬지"
서상호(95) 씨는 구룡포에서 나고 자랐다. 구룡포에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시절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한 명이다. "일본인들은 지금 구룡포항 인근에 모여 살았어요. 한국 사람들은 멀리 윗동네에 살았고. 일본인들이 처음 들어와서 집을 지을 터가 없으니 해안을 매립해서 집을 짓기 시작하더라고. 구룡포항에는 한국인은 서너 집에 불과했고 전부 일본인이었어요." 풍습도 많이 달랐다. 일본에서는 양력 설을 지낸다. "12월 20일쯤 되면 일본에서 가가미모치(설날 신에게 바치기 위해 특별히 차리는 떡)를 만드는 사람들이 건너왔어요. 그런데 단오나 삼짇날, 초파일 등 우리 전통 명절이나 씨름 같은 전통행사를 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체가 싫었던 거지."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던 고등어나 정어리, 꽁치 같은 등푸른생선을 잡아 일본에 가져가 비싸게 팔았다. 하지만 일본인 어부들이 들어오면서 한국 어부들은 생활 터전을 잃었다. 어업을 허가제로 운영하면서 한국인들에게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다를 잃은 사람들은 일본인 밑에서 품삯을 받는 일꾼이 되거나 어렵게 농사를 지었다. "고등어나 정어리가 나는 철이 되면 수만여 명이 구룡포에 왔어요. 해가 지면 술집이나 유곽이 불야성을 이뤘지. 좁은 거리는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다녀야 할 정도였어요. 개가 돈을 물고 다닌다고 하잖아요.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요. 골목에서 급한 볼일을 본 사람이 휴지가 없으니까 1원짜리 지폐로 뒤처리를 하거든. 그러면 변을 먹은 동네 개들이 돈을 물고 다니면서 나온 말이에요. 잡은 정어리를 제때 운반을 못 해서 썩어버리는 정도였으니까."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은 모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일본으로 잠시 피했다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집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떠났으니까.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죠. 우리는 그 사람들 재산 안 뺏고 다다미까지 뜯어가도록 그냥 뒀어요.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고." 서 씨는 "근대문화역사거리를 걸으면 술 먹고 노래하던 시절, 연애하던 기억도 난다"며 슬며시 웃었다.
구룡포에서 경주로 가려면 장기면으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르다. 구룡포지선 장기면에는 장기읍성이 있다. 장기면사무소 옆길로 300m가량 오르막을 걸으면 된다. 장기읍성은 경주를 방어하던 전초기지였다. 읍성의 둘레는 1.3㎞로 동서가 긴 마름모꼴 형태다. 성벽 위에 오르면 멀리 동해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성 안쪽에는 교육기관이었던 장기향교와 관청이었던 동헌의 터가 남아 있다.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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