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게 아니라 잘 설계된 금융 시스템으로 먹잇감을 찾는다. 이른바 제국주의가 물러간 자리에 자본권력, 역외 금융, 유로마켓이 괴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권력이 국가권력을 농락한다. 우리나라도 이미 당했다. 2004년 벨기에에 주소를 둔 페이퍼 컴퍼니가 외환은행을 팔아서 1조 5천억 원을 벌었으나 우리 국세청에는 돈 한 푼 내지 않았다. 당시 한국과 벨기에 간 조세협정이 미비해서 원천징수할 권한 즉 과세권이 없었으니 뻔히 보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과세 구멍(loophole)을 선제적으로 막아야 하는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다.
한국만이 아니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이다. 미국은 이미 케네디 시절, 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데 많은 돈이 필요하자 세금 회피를 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규제책을 마련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글로벌 교역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이 미국 바깥에 머물지 못하도록 직접 과세하는 강력한 규제책을 마련했었다. 하지만 슬금슬금 허물어졌다. 강력한 규제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면서 예외 조항들이 하나둘 생겨나자 규제책은 힘을 잃었다. 지금 미국 기업들은 해외에 이익을 쌓아두면 과세하지 않는 허점을 이용해서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무임승차를 즐기고 있다. 최근 애플을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 오라클과 퀄컴, 그리고 나이키 등 18개 기업의 조세 회피 논란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조세 시민단체 '조세 정의를 위한 시민들'이 낸 보고서 '애플만이 아니다'를 보면 이들 기업은 조세 회피처에 해외 법인을 만들어 두고, 해외 수익을 금융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 국제 구호단체 옥스팜이 조세 회피처에 은닉된 재산이 총 18조 5천억 달러라고 추정했고, 이 자산에 과세할 경우 미국 정부로 돌아가는 세수는 무려 1천560억 달러나 된다. 세계은행 기준에 따라 하루 1달러로 살아가는 세계 최극빈층 10억 명을 다섯 달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뉴욕타임스가 추적 보도한 것에 따르면 애플은 최근 3년 동안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30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지만, 낸 세금은 달랑 2천만 달러이다. 부담 세율이 0.06%인 셈이다. 애플의 페이퍼 컴퍼니를 통한 꼼수는 심증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반사회적 탈세이지만, 현 조세 제도의 허점을 교묘하게 피했기 때문에 징세가 불가능하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독립 언론 뉴스타파는 지난달 27일 조세 회피처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와 쿡아일랜드 등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한국인 명단을 순차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245명의 한국인이 연루됐다고 밝힌 가운데, 이미 5차례 발표를 통해 전 경총회장 이수영 OCI 회장과 부인 김경자 OCI 미술관 관장, 전 대한항공 부회장 조중건(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 동생)의 부인 이영학 씨, 조욱래(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막냇동생) DSDL 회장, 또 한진해운 최은영(한진해운 홀딩스 회장) 회장, 한화역사 황용득 사장, 전 SK케미칼 조민호 대표이사 부회장, 대우그룹 이덕규 전 대우인터내셔널 이사, 전 중앙종금 김석기 사장과 부인인 연극인 윤석화, 전성용 경동대 총장, 전두환 전 대통령 장남 전재국 시공사 대표까지 이름을 올렸다.
국제 NGO인 조세정의네트워크가 밝힌 바에 따르면 1970년대부터 40년간 외국 자산 피난처로 옮겨진 국내 자산이 7천790억 달러(888조 원)에 달하고, 유출 규모로 보면 중국 러시아에 이어서 세 번째다. 이는 2011년 기준 국내총생산 70%에 해당하고, 올해 우리나라 예산이 342조인 데 비하면 두 배 반이 넘는 엄청난 규모다. 40년 평균, 매년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에 투입한 22조 원이 해외로 유출됐다는 얘기이다. 이것도 조세정의네트워크가 조세 회피처에 등록을 대행해 주는 단 2개 업체의 내부 자료를 분석한 결과이니 빙산의 일각이다.
재력과 권력을 가진 지배 엘리트들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조세를 회피하면서 사회로부터 편취한 이익의 규모가 얼마나 될지 짐작조차 어렵다. 꼼수로 해외 페이퍼 컴퍼니나 찾아다니면서 탈세형 절세, 법정신에 어긋나는 공격적 절세를 통해 비자금을 모으는 가진 자와 더 많이 가진 자들은 시대 흐름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 유리 봉투처럼 100% 벌이가 노출되는 월급 생활자나 가난한 사람에게 더 가혹하게 주어지고, 빅샷(거물)들은 피해가는 세금 문제, 제대로 해결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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