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나치 독일에는 피해자였지만 유대인에게는 가해자였다. 그것도 나치 못지않은. 나치 점령하 비시 정부는 독일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자발적으로 자국 내 유대인들을 잡아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독일로 끌려간 프랑스 유대인은 1942년 7월 16, 17일 비시 정부가 9천 명의 프랑스 경찰을 동원해 잡아들인 1만 3천여 명을 포함, 1944년까지 7만 6천 명에 이른다. 이 중에는 어린이 1만 1천 명도 있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두 가지였다. 자신의 몸이 완전 연소될 때까지 노예노동에 시달리다 죽거나 아니면 가스실로 가거나. 독일로 끌려간 프랑스 유대인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3천 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인들은 이 같은 유대인 사냥에 조금의 양심의 동요도 없었다. 오히려 반겼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삽화 하나. 1940년 12월 파리의 반유대주의 주간지 '오 필로리'(형틀이란 뜻)는 6만 명의 독자를 대상으로 유대인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공모했다. 가장 많은 응답은 맹수가 우글거리는 정글에 유대인을 떨어뜨리거나 소각로에 넣어 태워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오욕(汚辱)의 과거사에 대한 전후 프랑스인들의 태도는 침묵이었다. 드골에서 퐁피두, 지스카르 데스탱, 미테랑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초지일관 모른 척했다. 그 기저에는 프랑스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는 '비시'의 과오이지 프랑스의 과오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진짜' 프랑스는 깨끗했다는 자기기만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양심은 결코 죽지 않았다. 지난 1995년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프랑스 유대인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데 이어 2009년에는 프랑스 최고 행정재판소인 국사원(國事院)도 이를 재확인했다. 일본과는 다른, 문명국가다운 용감한 고백이었다.
일본을 방문 중인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일본 의회 연설에서 "고통이 있더라도 과거의 유산을 끝내야 할 시점"이라고 일본을 향해 일갈(一喝)했다. 부끄러운 과거를 갖고 있지만 뒤늦게나마 용감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기에 프랑스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이에 앞서 일본은 유엔 경제'사회'문화권리위원회로부터도 범국민 차원의 위안부 교육을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일본은 꿈쩍도 않고 있다. 일본에 문명국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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