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악마나 프라다를 입는다

한물간 이야기지만 지난해 여름 뜬금없는 아메리카노 논쟁이 있었다. 지금은 정계은퇴를 선언한 유시민 통합진보당 전 공동대표가 회의 석상에 커피를 들고 들어오자 '부르주아적 취향' 논쟁이 불거진 것이다. 이 논쟁의 시작은 콜라와 커피를 '미제(美帝)의 잔재'로 여겼던 1980년대부터인데 오랜만에 등장한 논쟁이라 7080이나 세시봉 가수를 보는 만큼이나 신선했다. 언론에서도 별것 아닌 일을 두고 설왕설래한 것을 보면 아마 추억 팔아먹기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더 깊은 정치적 의도는 내 알 바 아니고.

도대체 커피에 무슨 이미지가 있어서 '부르주아적 취향' 운운한 것일까. 지금의 장(場)에서 커피는 스타벅스로 대변되는 브랜드 이미지이다. 화이트 컬러 성공 신화를 꿈꾸는 이들에게 경제신문과 스타벅스 컵을 든 뉴요커들의 모습은 미래를 담보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메릴 스트립이 아침마다 스타벅스 커피를 주문한 것도 종이컵에 선명히 새겨진 여신의 이미지를 마시는 것이지 커피를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명품을 꼭 소비하고 말 테다'라는 의지는 브랜드를 계급과 문화의 기호로 여기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팔아먹기 위한 복잡한 전략이 숨겨져 있다. 시내버스 안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명품 가방은 짝퉁이건 아니건 이 전략에 동조했거나 속아 넘어간 경우인데 명품의 반(反) 신분 전략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다로 시작된 반신분 전략은 누구나 명품을 가질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내세운다.

코끼리표 전기밥솥을 써 본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이야기겠지만 명품 소비 헤게모니는 유한계급에서 노동계급으로 넘어왔다. 밥맛이 딱히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밀수품 뿐이었던 코끼리표 전기밥솥을 주방에 두면 자신이 유한계급에 속했다는 뿌듯함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20세기 이야기고 지금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유한계급 코스프레를 할 수 있다. 신용카드며 무이자할부며 수많은 금융상품이 코스프레의 조력자로 뒤를 봐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 좀 이상하다. 일부러 골목 구석에 자리한 이름 없는 커피숍을 찾는가 하면 용도폐기 직전의 필름카메라를 만지작거린다. 엉클 샘이 복음처럼 전한 미국화(Americanization)를 외면한 채 자신만의 문화를 소비한다. 오히려 억지스럽게 자기 것만을 찾기까지 한다. 이들은 세계가 새롭게 눈을 뜬 문화의 다원화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획일화를 거부한다는 말도 진부한 표현일만큼 현재의 청년은 새롭다. 문화를 가치로 생각한다면 청년에게 주목해야 할 이유다. 이들에게 프라다는 악마나 입는 것일지도 모른다.

권 오 성(대중음악평론가) museeros@gma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