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태흥의 이야기가 있는 음악풍경] 김추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김추자의 히트곡을 이름 그대로 영화화한
김추자의 히트곡을 이름 그대로 영화화한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영화 포스터. 박노식, 장동휘, 윤정희, 고은아, 김희라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연했다.

고등학교 시절, 모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자신이 월남 참전 용사라는 사실을 늘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서울의 유명대학을 나와 비록 지방의 공업고등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있지만 한 때는 월남의 전장에서 베트콩을 무찌른 정의의 용사라는 사실을 늘 힘주어 말하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곤 했다. 하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한 이야기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치열한 전투가 아니라 베트남 여자들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막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지만 나는 마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지방 공고에 다니는 너희가 무슨 공부냐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싫었고 이국의 여자들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참전 용사의 모습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 수업시간이면 늘 소설 같은 것들을 몰래 읽었고 그러다 발각되어 혼이 나면서 그 과목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베트남을 그저 강대한 미국을 이긴 공산 게릴라 나라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 선생님의 영향이 컸었고 또한 군사정권에 의해 베트남에 대한 정보 자체가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4학년이 되어서야 고 이영희 선생의 '베트남 전쟁'이라는 책을 읽게 되면서 베트남 전쟁 참전이 결코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베트남은 늘 마음의 빚을 갚아야 할 나라로 자리 잡았고 언제가 한번 가보고 싶은 땅이 되었다.

드디어 2005년 봄 베트남 여행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호찌민 시로 이름이 바뀐 사이공에서 베트남의 최북단 디엔비엔푸까지 한 달 보름가량 혼자서 배낭여행을 하면서 프랑스 식민지를 거쳐, 일본, 그리고 미국이라는 수많은 강대국과 싸워 이긴 저력이 어디에 있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 호찌민, 우리에게는 호지명으로 불린 이름이 그곳에 있었다. 1969년 9월 2일 그가 오랜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했을 때, 그가 남긴 유산은 낡은 옷 몇 벌과 구두가 전부였다. 베트남의 국부로 불린 그는 사적으로 단 한 푼의 재산도 소유하지 않았다. 그가 말년에 북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살았던 집이란 것도 작은 거실과 침실 하나가 붙어 있는 소박한 전통가옥이었다. 베트남 국민에게 호 아저씨라고 불리던 그에게 오직 중요한 것은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베트남 국민의 행복이었다.

1954년 북베트남에서의 토지개혁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자신의 명예보다는 오로지 국민의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했던 그가 눈물로 국민에게 호소한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 "가난한 농민들을 위한 토지 개혁의 대의는 옳았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고통받았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에 대해 당과 저는 깊이 사과를 드립니다." 국민의 신뢰를 잃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그의 진솔한 사과에 국민은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그리고 베트남이 통일되었을 때, 사이공의 이름을 호찌민 시로 부르는 것으로 베트남 국민들은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노이에 있는 그의 영묘에는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반바지와 소매 없는 옷차림을 통제하는 군인들에게 여행자들의 암묵적 동의는 완전한 인간에 대한 너무도 당연한 예의였다. 해질 무렵까지 그의 영묘가 있는 바딘 광장 앞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젊은 날, 가졌던 인간에 대한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엄격하고 대중에게 솔직한, 그야말로 성숙한 우리 시대의 인간을 본다는 것만으로 이미 베트남 전쟁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으리라.

불현듯 참전 용사를 자랑하던 그 선생님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떠올랐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였다. 당대의 여가수였던 김추자가 불렀던 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행복해했다. 노래를 부르며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또한 노랫말의 김상사는 돌아온 후에 과연 얼마나 행복했을까? 단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선생님이나 김상사 모두 그 전쟁의 승리자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북베트남의 대통령이 되고 나서 화려한 식사를 준비한 사람들에게 호찌민은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왕이 되기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 베트남 국민들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싸운 것이다."

전태흥 미래TNC 대표사원 62guevar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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