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건강편지] 스물세 살

분홍색 봉사 가운이 엉덩이를 푹 덮을 정도로 작은 키 때문일까? 나는 정말로 중학생인 줄 알았다. 지난 3월부터 토요일마다 예쁘장한 여학생이 엄마와 함께 호스피스병동에 봉사하러 왔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모녀 봉사자는 하는 일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환자의 휠체어를 밀어주거나, 물 한 잔 떠주는 일도 하지 않았다. 발마사지 선생님이 비지땀을 흘리면서 환자의 발을 매만지고 다녀도 힐끗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보호자용 병실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서 환자나 의사인 나만 빤히 쳐다봤다. 게다가 여학생이 입은 핫팬츠는 봉사 가운에 가려져서 '하의 실종'을 방불케 했다. 복장 때문에라도 무거운 말을 한 번은 해야만 했다.

"보통 학생들은 공부 때문에 방학 때만 봉사하러 오는데, 토요일마다 힘들지 않으세요?" "우리 아이는 K대학(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명문대) 졸업반이에요. 의전원 준비 중이라서 시간은 좀 많은 편이에요."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스펙을 쌓기 위해서 봉사하러 왔으면 좀 더 잘해야지. 망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하시는 일도 없으면서 병실에 앉아 있으시면 어색하거나 서먹서먹하지는 않나요? 어떤 봉사자는 좋은 마음으로 오셨다가도 해드릴 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시더라고요." "아, 지난번 호스피스 교육받을 때 봉사자 회장님도 그러셨어요. 근데 저는 마음의 부담은 별로 없어요. 딸아이가 처음에는 무서워하고 좀 그랬는데 몇 번 오니까 괜찮아하네요. 사실 봉사를 많이 해서 의전원에 진학할 봉사시간은 넉넉해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모녀 봉사자가 봉사하는 옆방에 정란 씨가 누워 있다. 정란 씨 딸도 스물세 살이다. 6년 전에 엄마가 뇌종양에 걸려서 고교 2학년부터는 뭐든지 혼자 다했다. 세 살 어린 남동생도 그녀 몫이다. 아빠는 아프신 엄마만 챙겼으니까. 그래도 늘 생글생글이다. 옆 침대에 위암으로 누워있는 환자가 화장실 갈 때면 부축도 해주고, 엄마 몸도 구석구석 베이비로션을 발라 촉촉하게 해준다.

정란 씨가 호흡을 멈추면서 본 마지막 대변도 울먹거리면서 스스럼없이 닦아냈다. 사망선언을 하러 갔을 때, 정란 씨는 핑크색 볼터치까지 살짝 올린 고운 화장을 하고 있었다. 아빠가 여기저기 집안 식구들한테 전화하는 동안, 임종실에서 혼자 준비한 그 일을 했나 보다.

스물세 살이 이렇게 다르면 여든세 살은 얼마나 달라질까? 하기야 그래도 모를 일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에는 언제나 반전이 있으니까.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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