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입치사와 금니 이야기…부자·멋쟁이 금니 자랑 유행, 멀쩡한 앞니에 금 씌워 장식

무분별 진료 치과의사와 마찰

일제강점기 치과분야를 말하며 입치사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선 1902년 9월 일본인 입치사인 코모리(小森)가 노다치과의원 옆에 있는 일본인 거주지에 개업한 것이 처음이었다. 당시 치과의사와 입치사는 별다른 구분이 없었다.

물론 일본은 1906년 치과의사법을 제정해 입치사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제도가 바뀌어 신분이 보장되지 않자 일본의 입치사들은 적잖은 치료비를 받을 수 있는 한국으로 몰려왔다. 1907년 무렵 한국에 있는 입치사는 10여 명에 이르렀지만 치과의사는 4, 5명에 그쳤다. 일제는 1913년 12월 '입치영업취제규칙'을 공포하며 한국 내 입치사의 허가조건을 강화하고, 입치영업의 한계를 정하고 광고도 제한했다. 그러나 일제는 침략정책에 동참한 입치사들을 제한하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입치사 허가는 무제한이었고 단속도 제대로 하지 않아 무분별하게 치과 진료를 했다. 제도가 있었지만 입치사와 치과의사 사이에 자주 마찰이 벌어졌다. 늘어난 입치사의 수는 치과의사 수보다 많았다. 1920년대 초반에는 입치사가 200여 명이나 됐지만 치과의사는 20여 명에 그쳤다.

입치사들의 치과 진료가 확대되면서 나쁜 풍조가 생겨났다. 당시 한국인들은 틀니나 보철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부분틀니가 들통날까 봐 연결고리를 금이 아니라 백금을 쓸 정도였다. 물론 이보다 20년가량 앞선 이야기지만 알렌의 기록에 따르면, 한 외국인 선장이 주막에서 밥을 먹고 입에서 틀니를 빼자 구경하던 한국인들이 기겁하며 도망쳤다고 한다.

그런데 치과 위생과는 무관하게 장식용으로 금니를 하는 이상한 풍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돈푼깨나 있는 부자나 멋내기 좋아하는 사람들, 기생들 사이에서 장식용으로 멀쩡한 앞니를 금으로 씌운 뒤 번쩍번쩍하는 금니를 자랑하고 다니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입치사들이 주도하던 20여 년간 이러한 풍조가 만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멀쩡한 이를 금으로 덮었으니 오래 갈 리가 없다. 결국 입치사들이 치료한 치아가 결과적으로 좋지 않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생겨나게 됐다.

한국인도 치과 분야에 진출했는데, 치과의사보다 입치사가 먼저 등장했다. 한국인 최초의 입치사는 최승룡이었으며, 1907년 서울 종로에서 개업했다. 기술을 전수한 사람은 확실치 않지만 노다 오지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한국인 입치사들은 본격적인 치과의사가 등장하기 전 일본인 치과의원에 진료 보조로 고용돼 서양 치과의술을 배워 개업했다.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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