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을(乙)' 관계는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는 뜨거운 이슈다. 갑을 관계는 계약 관계에서 등장하는 용어다. 당초 갑과 을은 합의한 계약 내용을 이행하는 동등한 주체였다. 하지만 우월적 지위에 있는 계약자를 갑으로, 약자를 을로 규정하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불평등한 관계를 일컫는 말로 자리 잡았다.
그동안 갑을 관계는 흔히 있는 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남양유업 사태를 계기로 갑을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갑의 횡포에 대한 을의 분노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면서 갑을 관계를 청산하자는 사회적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곪을 대로 곪은 것이 터진 셈이다.
갑을 관계가 고질적인 사회 병폐 현상으로 지목되면서 정치권에서는 갑을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도 발 벗고 나섰다. 대표적인 갑을 관계로 꼽혀온 프랜차이즈 본부와 가맹 사업자 사이의 불공정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표준근로계약서에서 갑과 을이라는 용어를 없애기로 했다.
하지만 정부는 정작 자신이 형성한 갑을 관계의 청산에는 무신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갑을 관계를 타파하기 위해 지방 재정을 늘리고 국비 배분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지만 개선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관치 금융의 갑을 관계가 부활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낙하산 인사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이에 따라 금융권에서는 관치 금융의 관행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았다. 하지만 새 정부 출범 이후 이루어진 주요 금융지주 회장의 교체 상황을 살펴보면 관치 금융의 부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홍기택 산은금융지주 회장은 스스로 낙하산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KB금융과 NH농협금융지주 회장에는 관료 출신들이 지명됐다. 게다가 금융 당국의 사퇴 압력을 받아 오던 이장호 BS금융지주 회장이 이달 10일 사퇴하면서 금융권에서는 금융 당국의 은행권 길들이기 수준이 너무 지나치다는 비난이 들끓고 있다. 정부가 힘의 우위를 앞세워 민간 금융회사 회장을 퇴진시켰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무소불위 식 관치 금융이 시장 질서를 교란시킬 수 있다며 우려감을 나타내고 있다. '찍히면 나가야 된다'는 식의 관치 금융 아래에서는 민간 금융회사도 눈치보기식 경영을 할 수 밖에 없고 이는 결국 시장의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을 관계는 계약서에서 용어가 없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관련 법이 만들어진다고 우리 사회에서 갑을 관계가 종식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법 제정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숙된 의식이다.
새 정부 들어 손톱 밑 가시빼기가 한창이다. 금융권 입장에서는 관치 금융으로 대변되는 금융 당국과의 갑을 관계가 손톱 밑 가시다. '우리는 언제 케케묵은 관치 금융 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금융업계 종사자들이 갖고 있는 의구심이자 바람이다. 새 정부는 창조 경제를 주창하며 금융권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새 정부가 등잔 밑에 있는 갑을 관계를 청산하고 금융권과 창조적인 관계를 정립하는 솔선수범을 보일 때 새 정부의 창조 경제론은 더 큰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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