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바뀐 5일장에는 구경거리가 더 풍성합니다. 난전에도 온갖 팔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망종(芒種)이 가까워져 오자 여름 햇살이 성큼 들어왔지만 장터는 여전히 다양한 모종들로 눈길을 끕니다. 오이와 가지, 고추는 말할 것도 없고 옥수수와 수수, 심지어 땅콩과 야콘의 어린 새싹들까지도 까만 비닐 잔에 담겨 선을 보입니다. 채소밭 갈이에 필요한 모종을 시장에서 사다 심는 일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판매하는 모종의 종류나 숫자가 늘어납니다. 어느 모종상 주인은 지난 초봄에는 완두콩 모종까지도 꽤 팔렸다면서 요즈음은 씨를 심는 대신 모종을 사다 심는 추세라 합니다. 집 앞 울타리 아래 혹은 채전밭 둘레로 몇 톨 뿌려두면 하룻밤 새파랗게 싹이 돋아나는 완두콩마저도 모종을 이식한다는 것이지요.
비가 개자 젖은 풀빛이 좋아 시골길로 나섰습니다. 논두렁에서 흙내음이 물씬 풍겨나고 삽앙(揷秧)을 기다리는 무논에선 개구리 소리까지 요란합니다. 들판은 한창 분분합니다. 한쪽에 써레질하는 수레가 열심히 돌아가는가 하면 다른 한 무논에선 모내기를 마친 이앙기가 빠져나옵니다. 들판을 벗어나려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별난 광고판을 읽습니다.
'좋은 볏모 팝니다.' 실하게 잘 자란 어린 볏모를 판다는 조금의 기교도 섞이지 않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너무나 낯선 호소로 들립니다. 막 무논을 나서려는 젊은 농부에게 "볏모를 다 팔다니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마치 나를 세상사에 무지한 사람인 양 퉁명스러운 얼굴로 쳐다보더니만 "처음 있는 일 아닌걸요, 벌써 몇 해 되었어요"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비켜나섭니다. 필요한 모종을 때맞게 사서 심는 세태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볏모까지 사서 심는 건 선뜻 수긍이 되지 않습니다.
청소년기를 보낼 때까지 나는 농사일을 종종 거들었습니다. 농가에서 씨앗을 준비하는 일은 농사의 시작이자 끝으로 여깁니다. 정성의 극단입니다. 아니 그것을 뛰어넘어 신성함까지 깃들인 농심이지요. 이듬해의 풍년을 기약하고 기다리는 일이니까요. 오죽하면 도둑도 씻나락은 훔치지 않는다고 했을까요. 씨보리, 씨감자, 씨옥수수, 씨콩…. 먹고 남는 알곡을 씨앗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거두어들일 때 미리 돌아오는 해를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볍씨처럼 귀한 것일수록 독이나 창고 속에 깊숙하게 갈무리하지만 옥수수나 기정 같은 것은 가새모춤으로 엮어 양지바른 처마 끝에 달아두곤 하지요.
농사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벼농사입니다. 그러기에 이른 봄 못자리 만들기는 그 규모나 노동력에 비하여 정서적으로 매우 귀한 일로 여깁니다. 볏모가 고르게 자라지 못한다거나 혹시 모자라서 이웃집에 꾸는 일이 생기노라면 여간 부끄럽게 생각지 않았지요.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났습니다. 나아가 무논점파(볍씨를 무논에 바로 뿌리는 직파)를 시도하고도 있습니다. 기존의 농법에 비하여 생산비를 줄일 뿐만 아니라 노동력이 35%나 절감된다는 연구결과를 본 듯합니다. 오랜 전통의 모내기가 점차 사라질 조짐입니다. 이른 봄날, 실한 씻나락을 고르고 볍씨를 틔우던 못자리는 먼 얘기 속의 것이 되어버릴 것만 같습니다. 못자리가 없는 농촌 풍경은 내게는 참으로 밋밋하게 상상됩니다. 절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농사의 중요한 과정을 그냥 뛰어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손놀림으로 굳은 흙을 파 고르고, 흙냄새 속으로 한 톨의 씨를 묻은 뒤에 새싹이 터 나오는 날을 지키는 것이 농부들의 한결같은 마음자리입니다. 씨앗과 전혀 다른 모양의 새로운 생명체가 땅을 열고 드러날 때 그 첫 만남은 나에게 경이로움, 그것입니다. 비록 가늘고 여린 새싹이지만 저마다 간직한 무수한 이야기로 내 귀를 기울이게 하고 그 진동에 전율하게 합니다. 마음 졸인 기다림의 환희를 맛보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네는 알곡 중에서 씨로 쓸 감을 골라 갈무리하는 정성과 그 씨앗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신비의 선율을 어디서 들을 수 있을까요. 편리에 묻힌 대가를 너무 비싸게 지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모종 가게에서 그 감동과 선율까지도 팔고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들판 군데군데 이앙기 소리가 윙윙거립니다. 무논에 엎디어서도 흥에 겨워 구성지게 부르던 모내기 노래들도 더더욱 듣기가 어려워지겠지요.
김정식/담나누미 스토리텔링연구원장 gasan3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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