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젊은 사람들에게 '꿈꾸지 말라'는 강의를 합니다. 제발 꿈 좀 꾸지 말라는 게 강의의 주요 포인트예요. 우리 제발 꿈꾸지 말고 삽시다. 꾸려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잘 살지, 그런 작은 꿈을 꾸면서 삽시다. 교수가 되고 말 테야, 큰 사람이 될 거야, 꼭 대기업에 취직해 임원이 되겠어, 연봉 3억을 받겠어, 이런 꿈 좀 꾸지 말고 말입니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 중에서)
사실 '꿈을 가져라'는 말이 '공부해라'는 말보다는 훨씬 긍정적이다. 하지만 왜곡된 꿈은 오직 성적(점수)뿐인 공부보다 더 문제가 있다. '항상 더 나아져야 한다. 기회는 주어져 있으니 이를 이용해야 한다. 인간의 새로운 이상형은 불굴의 의지로 기회를 모색하고 자기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기업가적 정신이다. 자신의 삶을 최적화시키는 인간이다.(리처드 세넷의 '투게더' 중에서)는 것이 서구 민주주의, 또는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보편성이다.
더 좋은 직장, 더 많은 수입, 더 매력적인 몸, 더 똑똑한 자녀, 더 멋진 집 등 모든 사람이 같은 꿈을 꾼다. 이런 것들이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그것이 바로 꿈'이라고 강요한다. 그것이 과연 꿈일 수 있을까? 진로교육을 한답시고 실천하는 대부분의 교육활동이 직업에 대한 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다양한 직업을 말하고 있지만 그 다양성은 더 좋은 직장이라는 욕망에 함몰되어 버린다. 더 좋은 직장은 현실적으로는 더 많은 수입과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더 좋은 직장과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을 외면하고 끝없이 꿈을 주입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이것은 제로섬을 넘어 마이너스섬 게임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결국 좌절한 젊은이들에게 향하는 것은 '너, 그것밖에 안 돼?'나 '원래 넌 그것밖에 안 됐어!'라는 비아냥이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위로의 말이다. 비아냥도, 위로도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최근 갑자기 차고 넘치는 꿈 관련 멘토들에게 말하고 싶다. 진실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기에 오히려 꿈이 존재한다고.
인문학자 고미숙이 모 여고 학생들과 나눈 100% 실제 대화란다. "아직도 하루에 열두세 시간씩 수업을 받다니, 대체 왜 그러는 거지?" "대학에 가려고요." "대학은 왜 가는 건데?" "취업해야죠." "취업하면?" "돈을 벌어야죠." "그 다음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죠." "그 다음엔?" "다시 아이를 교육시켜야 돼요." 처음엔 당당했다. '당연한 걸 왜 묻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점점 뒤로 갈수록 학생들의 목소리가 작아지더니 마지막엔 본인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뜨리더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학교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잖아. 사람을 만나고 인생을 배우는 곳 아니냐?'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학교가, 특히 대학이 경쟁력과 스펙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가장 먼저 버린 항목이다. '사람과 인생'이라는 가치를 버린 그 자리를 실용이 채웠다.
우리 시대의 교육은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오직 대학이라는 목표를 위해 존재한다. 즉, 10대는 그 자체로 어떤 의미도 없고 대학 입학을 위한 과도기에 불과하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대학 갈 때까지 참으라고 한다.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삶의 문제는 더 복잡하게 지속된다. 그러니 다음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또 참아야 한다. 그러면 우린 언제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니 오히려 꿈꾸지 말라고 말할 수밖에. 꿈이 행복을 위한 중요한 요소라면 꿈에 대한 고민은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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