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 시조로 푼 한시] 次韻許正言見寄(차운허정언견기) / 안축

풍속이 야박하니 누가 내 가르침 따르리

고려(高麗)는 13세기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피폐화되었고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몽골 제국의 압박으로 원나라의 연호를 써야 했는가 하면 다음 보위에 오를 원자는 원나라의 풍습을 따랐다. 그래서 임금의 칭호 앞에 '충'(忠) 자를 붙이기 했다.

그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관에 진출한 사람이 많았다. 시인은 신흥 유학자로 새로운 제도와 풍습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저항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런 개혁적인 뜻을 갖고 충숙왕 복위 원년에 파직과 복위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 심회를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북산이문 펴서 읽고 부끄럽게 여기었네

야박한 풍속인데 내 가르침 누가 따르랴

폐단이 난무한 세상에 구할 계책 없구나

燈前優讀北山移 自愧歸休已太遲

등전우독북산이 자괴귀휴이태지

俗薄何人遵我敎 弊深無計救此時

속박하인준아교 폐심무계구차시

【한자와 어구】

燈前: 등불 앞/ 優: 근심하다/ 讀: 읽다/ 北山移: 북산이문 책/ 自愧: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다/ 歸休: 돌아와 쉬다/ 已太遲: 이미 너무 늦다/ 俗薄: 풍속이 야박하다/ 何人: 어느 누가/ 遵: 따르다/ 我敎: 나의 가르침/ 弊深: 깊은 폐단/ 無計救: 구할 계책이 없다/ 此時: 이 시절

'풍속이 야박하니 누가 내 가르침 따르리'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근재(謹齋) 안축(安軸'1282~1348)이다. 위 한시문을 의역하면 '등불 앞에서 근심해 북산이문 책을 읽고 / 돌아와 쉬니 너무 늦었음을 부끄럽게 여긴다네 / 풍속이 야박해 누가 내 가르침을 따르리오 / 폐단 많은 세상인데 이 시절 구할 계책 하나 없구나'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 '次韻許正言見寄'는 '허정언의 견기에 차운함'으로 번역된다. 허정연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북산(北山)은 중국 남경 북쪽 산이고, 이문(移文)은 글의 문체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포고문, 통고문과 비슷한 글이다. '북산이문'은 중국 남북조시대 남제(南齊)의 문인, 공치규(孔稚圭'447~501)가 지었는데 '고문진보'에 전한다.

저자는 이 책을 읽은 후 풍속의 야박함을 꾸짖고 있다. 시인은 '북산이문'에 취했던 모양이다. 이 글에 푹 빠졌던 시인은 잠시 쉬면서 너무 늦게 깨닫는 자기를 부끄럽게 여기면서 세상을 구할 계책을 생각해 본다. 혼탁할대로 혼탁해진 고려 말의 어수선한 세상에 비애를 느꼈던 모습도 보인다.

그래서 화자는 풍속이 야박한데 누가 내 가르침을 따르겠는가라고 비관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얼마나 많은 폐단 속에 살았던가를 짐작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을 구할 계책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서성이는 화자의 몸부림을 시문 속에서 찾게 된다. 역설적인 모순이다.

안축=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지금의 경북 풍기인 순흥 죽계(竹溪)에서 태어났다. 신흥유학자의 한 사람으로, 탁월한 재질로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하였다. 문과에 급제해 전주사록'사헌규정'단양부주부를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년)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서 성균학정'우사간대부를 거쳐, 충혜왕 때 왕명으로 강원도존무사로 파견됐다. 이때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충군애민(忠君愛民)의 뜻이 담겨 있다. 1332년(충숙왕 복위 1년)에 판전교지전법사에서 파면당했다가 전법판서로 복직됐으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파직됐다. 충혜왕이 복위한 뒤 다시 등용돼 상주목사 등을 지냈다.

그는 경기체가인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어 문명이 높았다. 흥녕군(興寧君)에 봉하여진 뒤 죽었다.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근재집'(謹齋集)이 있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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