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소진되고 있다. 일에만 매달리다 자신의 모든 걸 태워버려 더 이상 뭔가를 할 육체적, 정신적 의욕이 사라진 현대인들이 늘고 있다.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무장하고 버텨보지만 정작 의욕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 성과에 대한 압박감, 여기다 미래에 대한 불안까지….
심신이 피곤하다. 휴일 내내 잠을 자거나 건강기능식품을 입에 달고 살아도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 정부는 '국민행복시대'를 외치고 있지만 일만 하다가 죽을 것만 같다.
◆일 자체가 삶
지역 중소기업에 다니는 황종성(가명'43) 씨. 별명이 '묵일선생'이다. 묵묵히 일만 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전날 아무리 늦게 자도 아침 일찍 일어난다. 퇴근 뒤에도 업무에 관한 걱정이 떠나지 않는다. 일이 너무 많아 휴가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면 안절부절못한다. 언제 어디서나 일할 자세와 준비가 돼 있다. 혼자 보내는 점심시간에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서류나 일감을 검토한다. 휴일에도 밀린 업무 처리를 한다. 매일매일 할 일을 빡빡하게 리스트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불안하다.
최근 경고음이 들어왔다. 갑자기 체중이 10㎏이나 늘었다. 주위에서는 '얼굴빛 좋다'는 소리를 듣지만 '빛 좋은 개살구'다. 일로 인한 스트레스와 만성피로가 시작됐다. 병원을 찾은 종성 씨는 업무로 말미암은 극도의 피로. 이른바 '소진현상'(burnout)을 겪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진수(가명'46) 씨는 아침마다 일어나는 것이 힘들다. 제때 출근하려면 오전 8시 전에 집을 나서야 하지만 더 자고 싶은 마음에 아침마저 거른다. 퇴근 후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쓰러져 잠만 잔다. 그렇다고 직장 일에 소홀히 할 수도 없다. 승진 심사까지 앞두고 있어 직장 상사부터 후배까지 신경 써야 한다. 취미나 여가생활을 반납한 지도 오래다. 일하지 않으면 죄의식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최근 연차휴가를 내고도 직장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자신을 발견한 진수 씨는 병원을 찾았다.
어리다고 예외는 아니다. 대구 수성구에 사는 초등학교 5학년 최유정(가명) 양은 일주일 내내 꽉 찬 학원 스케줄을 소화한다. 학교에서 돌아와 영어, 수학, 피아노에 체육학원까지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각은 자정 무렵이다. 친구들도 비슷하게 학원에 매여 있어 신나게 놀 시간이란 없다. 주5일 수업제가 시행되면서 모든 토요일이 '놀토'(노는 토요일)로 바뀐 지 오래지만 학교를 가지 않을 뿐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다. 엄마는 어른이 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열두 살 유정이는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소진현상 사회 전반 확산
소진현상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지나치게 일에 얽매이다 보니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소진현상에 빠진 직장인들은 소화기 질환 등 육체적 이상을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심한 경우에는 불안장애, 우울증, 자살까지 이어지기도 한다고 경고했다. 최근에는 소진현상을 경험한 고용노동자의 사망률이 높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김양태 계명대 동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일중독으로 인한 소진현상은 마약'알코올중독 못지않게 건강에 좋지 않다. 불면증, 두통, 부교감 신경의 이완으로 전신 통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특히 소진현상을 겪는 직장인들의 대부분은 강박증세도 가지고 있어 치료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했다. 또 "심리적으로 불안정할수록, 자존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소진현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일중독 환자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치료가 시작된다"고 했다.
소진현상의 확산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과거 30, 40대 직장인들이 주로 소진현상을 겪었다면 최근에는 소진현상을 호소하는 청소년들도 느는 추세다.
김 교수는 "과도한 경쟁으로 소진되는 시기가 빨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30, 40대 남성 위주의 환자들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청소년과 여성들도 병원을 많이 찾는다"고 했다.
◆'소진'으로 모는 사회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의 '무한경쟁'과 '사회적 불안' 등이 소진사회로 내몰고 있다고 진단한다. 윤병철 대구가톨릭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소진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는 "유치원 때부터 시작된 무한경쟁은 평생을 두고 이어진다. 중'고등학교에선 명문대 진학을 위한 교육 경쟁에 시달리고 막상 대학에 들어가도 학점, 어학연수 등 좋은 스펙을 만들어 취업 전장에 나설 태세를 갖춰야 한다"며 "입사하면 진짜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적잖은 업무가 기다리고 성과나 승진에 대한 무한경쟁이 시작된다"고 했다.
최근 일고 있는 '나쁜 기업 신드롬' 역시 소진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중소기업부터 대기업까지 여전히 고용 확대를 꺼리는 대신 기존 직원들에게 늘어난 업무까지 떠맡기는 '나쁜 기업'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근로자들이 전문 분야가 아닌 업무까지 떠안게 되면서 '슈퍼 직장인'이 되기를 강요받고 있다.
지역의 한 중소기업에서 기술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김모 씨는 "업무효율을 강조하는 바람에 기술직임에도 영업 문의까지 응대해야 하며 안내 데스크들이 처리하던 기본적인 전화도 직접 받는 경우가 다반사다"고 했다.
삼일회계법인 최창윤 이사는 "불안한 경영 환경이 이어지면서 기업뿐 아니라 구성원들도 언제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느 것 하나라도 남보다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감이 직장인들을 소진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중독에 빠진 사람을 '열정적인 사람' '일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소진사회로 내몰고 있다. 도건우 2040 미래연구소 소장은 "소진현상을 겪는 사람들이 스스로 힘든 업무를 성취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가족과 미래를 위해서 그러한 희생과 고통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