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세 시대 은퇴의 재발견] <2부>행복한 은퇴자들 ⑫신세대 귀농인 하득용 씨

서울 강남 직장 대신 오미자 밭으로 출근…왜 더 일찍 오지 못했을까

집 앞 오미자밭에서 일하는 하득용 씨는 일터만 도시에서 시골 오미자밭으로 옮겼을 뿐 여느 직장인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아침에 출근하듯 밭으로 나가 일하고 저녁 7시 30분경에 집으로 퇴근한다.
집 앞 오미자밭에서 일하는 하득용 씨는 일터만 도시에서 시골 오미자밭으로 옮겼을 뿐 여느 직장인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아침에 출근하듯 밭으로 나가 일하고 저녁 7시 30분경에 집으로 퇴근한다.
부부 함께 오미자맥주를 만들고 있다.
부부 함께 오미자맥주를 만들고 있다.

"귀농요? 직장을 서울 강남에서 문경 오미자밭으로 옮겼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매일 밭으로 출근하고 일 끝나면 집으로 퇴근하는 것이지요."

3년 전 서울서 문경으로 온 하득용(47'경북 문경시 문경읍 각서 2리) 씨. 집 밖에서는 영락없는 농사꾼이었지만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는 예전의 서울 생활을 그대로 누리고 있었다. 올해 입주한 그의 집은 아파트처럼 깔끔했다.

직장생활 20년 만에 미련 없이 도시생활을 접고 시골로 온 그는 한 해에 1천만원 정도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받았던 월급에 비하면 아주 적은 액수지만 5년 정도는 적자를 각오했단다. 그 대신 아이들은 밤하늘의 별을 발견했고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마음을 여는 방법을 알게 됐다.

부부는 조금 더 일찍 귀농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그들이 들려준 젊은 청산별곡(靑山別曲)은 자신에 넘쳐 있었고 신선했다.

-어떻게 귀농을 결심하게 됐나.

"초등학교 때부터 농사짓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농대를 나왔다. 사정이 있어 바로 농사를 짓지 못하고 서울 강남에서 무역회사를 다녔다. 10년만 하고 그만둘 생각이었으나 아이들이 어렸다. 20년 되던 해에 회사를 접었다. 지금까지 하고 싶은 것은 하면서 살아왔다. 농사를 짓는 일도 하고 싶었던 것이었기에 하러 왔다. 공부하고 싶을 때 공부했고 마라톤하고 싶을 때 마라톤 한 것과 똑같다."

-문경이 고향인가.

"아내와 나는 서울에서만 45년을 살았다. 귀농 후보지로 문경 하동 단양 산청을 점찍었다. 휴가 때마다 아내와 함께 4곳을 집중적으로 다녔다. 가장 가고 싶은 곳은 하동이었으나 땅값이 너무 비쌌고 부모님이 계시는 서울과 멀어 포기했다. 문경은 서울과 가까웠고 구미에서 근무할 때 이곳에 자주 놀러 왔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가족이 다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결혼하면서 아내(안미정'45)에게 가장 먼저 다짐받은 것이 시골에서 산다는 조건이었다. 아내는 당연히 승낙했고 아이들이 문제였다. 당시 초등학생인 딸과 중학생인 아들이 시골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딸은 오케이를 했으나 아들은 이사 하루 전날까지 안 가겠다고 버텼다. 다음날 마음을 바꾸었다."

- 자녀 교육에 어려움은 없는가.

"불편한 점이 많다. 대중교통이 안 좋아 학교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교우관계나 이곳 생활 적응에 힘들어했다. 그러나 좋은 점도 많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마주친 별은 아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숲길은 사춘기인 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식구보다 1년 먼저 내려왔다.

"2011년 3월 사표를 내고 다음날 혼자 내려왔다. 말하자면 예행연습이었다. 문경시 산북면에 와서 월 5만원의 빈집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때 동네 사람들이 붙여준 내 별명은 '등신'이었다. 오미자 밭을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알고 보니 그 땅은 오미자 농사를 짓기 부적합한 곳이었고 오미자 역시 수령이 오래되었다. 버려야 할 밭을 나에게 준 것이었다. 그런데도 정말 열심히 일했다. 농기계도 없이 오로지 손으로 1년 동안 농사를 지었다. 그해 1천200만 원의 수확이 났다. 자신감이 생겼고 서울로 되돌아갈 생각은 아예 없었다."

-오미자를 선택한 이유는.

"벼농사로는 승산이 없었다. 오랫동안 농사만을 지어온 사람들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용작물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무농약 오미자였다.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할 수 있고 앞으로 경쟁력이 더 있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문경 오기 전에 농사를 위한 준비를 했나.

"퇴직하기 3년 전부터 농촌진흥청의 사이버귀농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막상 농사를 지어보니 그 공부는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다. 토양이나 나무마다 성격이 달라 새롭게 배워야 했다. 여기서 1년 동안 오미자대학도 다녔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거의 별장 수준이다.

"흔히들 귀농인이라면 생활한복을 입고 머리를 묶은 채 황토집에 사는 것을 떠올린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밭에서는 농부이지만 집에 들어오면 아파트의 편리함과 깔끔함을 누리고 싶었다. 지난해 10월부터 짓기 시작해 올해 2월에 입주했다.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숙박 대기표를 받아야 할 만큼 순서가 밀려 있다. 다들 오고 싶어한다."

-장남이라고 했다. 부모님은 시골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나.

"처음에는 많이 반대하셨다. 그런데 장인어른은 자주 와서 일주일쯤 머물며 농사일을 많이 도와주신다. 장인어른과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한 것은 처음이다. 부모님은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매일 전화 하신다."

-판로 개척에 어려움은 없나.

"판로랄 것도 없다. 아는 사람들이 오미자를 다 사간다. 늘 생산량이 부족할 뿐이다. 앞으로 3년 있으면 집 앞뒤 1만6천500㎡(5천 평) 오미자밭에서 수확이 날 것이다. 그때는 인터넷을 통해 판매할 생각이다. 농부 명함도 만들어두었다."

-귀농하고 싶은 사람에게 들려줄 이야기도 많을 것 같다.

"문경만 해도 땅값이 2년 만에 몇 배가 올랐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오라고 권하고 싶다. 또 귀농이냐 귀촌이냐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귀촌은 텃밭 정도 가꾸며 살면 되지만 귀농은 직업이다. 그만큼 계획도 준비도 철저해야 한다. 10년 정도 멀리 보고 계획을 세워야 하며 5년 정도 수입이 없어도 버틸 수 있는 준비를 미리 해 와야 한다."

-앞으로 계획은.

"오미자는 9월에 수확한다. 6월 정도 수확하는 작물을 심을 계획이다. 일 년에 두 번은 수익이 나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이것이 제대로 되면 10년 뒤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싶다. 아내는 지금 서울로 일주일에 두 번씩 상담공부 하러 다닌다. 2급 자격증을 따면 이곳에서 학생과 노인들을 대상으로 상담봉사도 하고 힐링 숲치유를 하고 싶어 한다. 농촌생활을 한다고 꿈을 접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꿈을 멋지게 키워나가고 있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는가.

"또래가 없고 소통할 이웃이 없어 아쉽다. 이런 것들은 좋은 공기를 마시고 깨끗한 환경을 누리는 데 비하면 사소한 문제다. 아이들과 아내는 천식과 알레르기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는데 아주 좋아졌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빨리 오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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