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살면서 광어(넙치) 회 한 점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만큼 흔한 어종 가운데 하나로 가히 '국민 생선'이라 할 만하다. 지방질 함량이 적은 데다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어 횟감으로서 최고 인기를 자랑한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양식 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서민들이 광어를 맛보기는 힘들었다. 자연산 광어는 30년 전인 1980년대 초반, 수산시장에서 1㎏당 3만원 선에 팔렸다고 한다. 대하수산 대표 민병서(71) 수산학 박사와 같은 선구자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광어는 어쩌면 아직도 '고급 어종'으로 분류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국내 첫 광어 양식법 개발
민 박사는 광어 양식법을 국내에서 처음 개발한 공로로 1986년 근정포장(勤政褒章)을 수상했다. 국립수산진흥원 거제종묘배양장 소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당시 '기르는 어업'이 어민 소득 증대를 위한 수산업계의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저는 수산진흥원에서 어류 담당 연구관으로 일하면서 광어란 놈을 파고들었지요. 후배 연구원 대여섯 명과 몇 년 동안 씨름했던 일이 아직 생생합니다. 바닷물고기 양식은 처음이라 언론에서도 대서특필됐는데, TV 뉴스를 본 친지들이 격려전화를 많이 주셨던 것도 기억나는군요."
광어 양식의 성공은 우리나라 양식 역사에서 상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그 이전에는 해조류'어패류 양식이 고작이었고, 바닷물고기는 방어 새끼를 잡아 가두리에서 키우는 수준에 그쳤다. 광어 양식이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산업화되면서 국내 양식 기술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게 됐고,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세계 최고 생산력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현재 국내 양식 넙치 생산은 연간 5만t, 5천억원 규모이며, 세계 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제가 광어 양식 기술을 첫 개발할 당시만 해도 수산업 선진국인 일본이 5, 6년은 앞서 있었습니다. 물론 환경과 시장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제는 일본에 비해 뒤처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참다랑어 완전양식에 성공할 전망이라는 뉴스도 얼마 전에 나와서 무척 반가웠고요. 앞으로 연구자들도 더욱 분발해야겠지만 정부와 사회의 관심도 높아져야 합니다."
민 박사는 그러나 우리나라 해양수산 분야를 연구하는 유일한 국립연구기관인 수산진흥원을 1989년 그만뒀다. 장래가 보장된 연구관 생활 대신 광어 새끼를 생산, 양식장에 공급하는 회사를 직접 차렸다. 국내 수산 벤처 1호 격인 '대하수산'(울진군 원남면 오산리)의 시작이다.
"공무원으로서의 연구에 한계를 느꼈죠. 제가 해보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못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특히 1차산업 분야의 연구원 생활은 생각보다 힘듭니다. 물론 원천기술을 갖고 있던 터라 요즘 말로 '블루 오션'(blue ocean'경쟁자가 없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자신도 있었고요. 제가 공직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교수 자리를 제안한 대학도 있었지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이 국내 물고기 종묘 분야에서 유일한 박사 학위 소지자일 것이란 민 박사의 말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고 하자 눈썹까지 세어버린 백발의 노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좋은 직장, 좋은 집만 바라고 사는 건 최악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살아보니 인생은 절대로 길지 않습디다."
◆친환경 양식법으로 신지식인 선정
다시 태어나더라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는 지난 2008년 또 한 번 큰 상을 받았다. '무항생제 순환여과식 넙치 양식법'을 개발한 공로로 농림부 '수산 신지식인'에 선정된 것. 이 상은 수산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의 습득'창의적 발상으로 일하는 방식 등을 혁신해 부가가치를 창출한 어업인들에게 1999년부터 시상하고 있다.
"제가 1977년 미국 시애틀에서 1년간 공부했던 게 바로 이 순환여과식 양식법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쓸모없는 기술이었죠. 경기도 청평 등지에서 잉어 양식이 붐을 이뤘는데 수질 오염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정부에서도 오직 많이 길러내는 것만 장려했거든요. 항생제를 쓰지 않는 순환여과식 양식은 환경을 생각하는 양식법이라고 보면 됩니다."
민 박사가 무항생제 순환여과식 양식법 연구에 본격 착수한 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이었다. 전반적인 수요 감소에다 세균성 질병이 크게 유행하는 바람에 전국의 양식장이 휘청거렸다. 장기간 양식에 따른 연안의 병원성 미생물 토착화가 원인으로, 바다 양식장뿐 아니라 해수를 쓰는 육상 양식장에도 질병이 만연했다.
"양식업계가 존폐의 기로에 선 상황이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더군요. 일반 양식장이 살아야 치어를 생산'공급하는 종묘장도 살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 하면 병 없는 양식이 가능할까를 고민하다 혼자 연구를 시작했지요. 대학과 연구소 후배였던 아내의 도움도 적지않았고요."
기술 개발은 쉽지 않았다. 개선에 개선을 거듭해 상용화 수준까지 오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물속에서 물고기 배설물'병원균 등을 끌어들이는 흡착제도 이것저것을 다 실험해 봤다. 처음에는 황토, 제올라이트(zeolite)를 사용했지만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경주에서 주로 생산되는 벤토나이트(bentonite) 점토로 바꿨다. 이 같은 광물 미립자는 포말분리장치를 통해 분리배출되고 사육에 쓰인 물은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예비시험 결과를 2000년 한국양식학회지에 발표한 뒤 효과를 인정받아 이듬해 정부의 해양수산 벤처기업 기술개발지원사업에 선정됐습니다. 이후 2002년과 2004년에 관련 특허 2건을 받았고, 2010년에는 경북어업기술센터에서 '녹색성장형 어류 양식 시범어장'으로 지정됐지요. 아마 전 세계에서 유일한 시스템일 겁니다만 생각만큼 보급이 쉽지 않아 고민입니다. 기존 양식업자들이 새로 양식장을 짓기는 힘든 형편인 만큼 정부가 관심을 가져주면 좋을 텐데…."
민 박사는 연간 20t 규모의 광어를 생산할 수 있는 파일럿(pilot) 시설에 대한 채산성'효과 검증이 내년쯤 마무리되면 세계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학회지에 그동안의 성과를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강도다리의 동해안 특산품화 몰두
민 박사가 1989년 전혀 연고가 없던 울진에 터를 잡은 것은 깨끗한 환경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깨끗하고 오염되지 않은 물은 양식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인프라다. 대하수산 인근의 울진 망양해수욕장은 지난해 정부의 전국 해수욕장 평가에서 가장 우수한 3곳 가운데 하나로 뽑혔다.
"양식장을 할 만한 곳을 찾아 전국 안 가본 데가 없었는데 울진이 최적지였습니다. 제가 온 뒤에 1993년 수산진흥원 울진종묘배양장도 바로 옆에 들어섰고요. 몇 년 전까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치어 생산과 무항생제 양식법에 대해 강의할 때는 교통이 다소 불편했지만 이제는 울진 밖으로 나갈 일도 없어 불편한 게 없어요. 친척들이 있는 서울은 명절에나 올라갑니다."
그가 최근 강(江)도다리에 몰두하고 있는 것도 청정 동해안의 특산품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강도다리는 도다리의 한 종류로, 강 하구에 주로 서식하며 횟감으로 뛰어나다.
"2006년부터 광어 치어 생산은 후배에게 물려주고 강도다리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맛이 좋아 동해안 특산 어종으로 개발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도다리는 전 세계적으로도 북태평양 연안에만 분포하는데 겨울철 해수 온도가 낮은 동해안에서는 광어보다 훨씬 양식에 유리합니다. 성장속도도 광어보다 빠르고요."
이달 17일 찾은 대하수산 양식장은 검은색 차광막을 씌운 비닐하우스 형태였다. 약 70m 길이의 직사각형 2층 수조에는 펌프'포말분리장치'산소공급장치 등 순환여과식 장비가 설치돼 있다. 수조의 물 깊이는 15㎝ 정도에 불과해 강도다리들이 퍼덕거리는 모습을 자세히 지켜볼 수도 있었다.
"양식장에서는 항생제는 물론 약이라고는 전혀 쓰지 않는데도 물고기가 병에 걸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연안 바닷물보다 더 깨끗하게 수조 안의 수질을 유지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는 높은 인구밀도에 따른 환경오염으로 사실 양식 어업에 좋지 않은 환경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 친환경 어업, 나아가 유기(有機) 어업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이지요."
민 박사는 요즘 은퇴를 앞둔 베이비붐세대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귀농'귀촌 현상에 '귀어'(歸漁)까지 더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100세 시대에 대도시에서 은퇴 후 20년을 준비하기란 솔직히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친환경 양식은 향후 경쟁력이 높은 분야여서 연간 1억원 정도의 수익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시키지도 않았지만 둘째아들도 수산학을 전공한 뒤 노르웨이를 거쳐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뱀장어 양식을 배우고 있습니다. 미래는 도전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글'사진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민병서 박사=민 박사는 서울에 살던 가족이 6'25전쟁을 피해 잠시 머물렀던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이후 서울로 복귀해 경기중'고를 거쳐 국립부산수산대(현재 부경대)를 졸업했다. 1973년부터 1989년까지 16년 동안 국립수산진흥원에서 연구했으며 재임 중 모교에서 수산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민 박사는 "어렸을 때부터 물고기나 곤충 키우는 것을 좋아했고,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 수산생물을 전공하게 됐다"며 "경기고 동창 가운데 수산대에 진학한 친구는 거의 없었다"고 회고했다.
민 박사는 1980년,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농림부 장관 표창을 받은 데 이어 1986년에는 광어 양식법 개발 공로로 근정포장을 수상했다. 2008년에는 무항생제 순환여과식 양식설비 개발로 '수산 신지식인'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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