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마음속 상처를 남긴 동족 간의 전쟁은 이 땅에서 다시는 일어나서 안 됩니다. 평화를 지키는 일은 안보교육과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1950년 10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인민군은 한국군과 미군의 시체 수십 구를 잔인하게 파헤쳐 길거리에 늘어놓았다. 매일 총성이 귓전을 때렸고 죽거나 다친 아군 수십여 명이 들것에 실려 돌아왔다. 이웃집에 초상이 나면 무서워서 외출도 못 하던 열다섯 소년 장병율(78'대구 달서구 상인동) 씨는 겁에 질려 총을 들어야 했다. 장 씨는 자신의 키만큼 큰 총을 어깨에 짊어지고 3년 동안 전장을 누볐다. 포성이 멈춘 지 어느덧 60년이 흘렀지만 뇌리에 박힌 기억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6월이 되면 그가 쉽게 잠들지 못하는 이유다.
1950년 8월 중학생이었던 장 씨는 '얼떨결에'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됐다. 물을 나르기 위해 물지게를 짊어지고 대구 중구 덕산파출소 인근으로 향하던 길에 만난 경찰은 그를 대륜중학교 운동장으로 무작정 끌고 갔다. 간단한 신체검사를 마친 뒤 그는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이유도 모른 채 몸을 실어야 했다.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시간도 없었다. 일본에서 그는 처음으로 교복이 아닌 '군복'을 입었다. 한 달간의 군사훈련을 마친 뒤 그가 향한 곳은 인민군 소탕 작전을 하던 함경남도 원산이었다. 원산을 시작으로 그는 3년간 전장을 떠돌았고, 1953년 7월 강원도 금화군에서 휴전을 맞이했다.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사지가 떨리고 무서웠지만 저도 총부리를 동족에게 겨눠야 했습니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틀어 놨다. 과학자를 꿈꾸던 장 씨가 돌아갈 수 있는 학교는 없었다. 친구들도 눈에서 살기가 느껴진다며 슬금슬금 피했다. 전쟁에서 느낀 공포, 두려움은 매일 밤 그를 찾아와 괴롭혔다. '소년병'으로서 참전 이력은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아 평생 일용직을 전전해야 했다. '소년병'이라는 이유로 국가는 그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포탄 파편이 튀어 받은 치료 기록을 어렵게 찾아 보훈청에 내밀자 그제야 상이군경 7급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33년이 지나서였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학교에 진학해 과학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삶의 많은 것을 파괴하는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장 씨는 전쟁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안보의식 강화와 올바른 역사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안전행정부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남녀 1천 명과 청소년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민 안보의식 여론조사' 결과 6'25전쟁 발발 연도를 성인의 35.8%, 청소년의 52.7%가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장 씨는 "청소년 대다수가 전쟁이 일어난 시기도 모르고 있다"며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가 어떻게 얻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면 앞으로 다가올 안보 위협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신선화기자 freshgir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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