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유전무죄와 헌법 11조 1항

1988년 탈주범 지강헌이 인질극을 벌이면서 외친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회자되는 세기의 유행어다.

이화여대 재학생과 졸업생이 최근 신문에 실은 광고에도 이 말이 나온다. '대한민국에서 더는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용납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법 앞에서 평등하게 심판받는 그날까지, 이화가 지켜보겠습니다.' 기업체 사장 부인이 여대생을 청부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대학병원 특실에서 4년 넘게 지낸 사실이 드러났다. 이화여대 재학생과 졸업생은 옳지 못한 법 집행에 분노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광고를 냈다.

형 집행정지는 죄를 짓고 복역 중인 사람이 질병으로 교도소 생활을 하기 어려울 때 일시적으로 석방해 병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교도소에서 빠져나오는 통로로 악용되고 있다. 경찰이 24시간 교대감시를 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해 형집행정지 기간에 수형자가 달아나는 경우도 발생한다.

징역 15년 형이 확정돼 수감생활을 하던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2002년 대장암 진단을 받고 위독하다는 의사의 진단서에 따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해외로 도망쳐 지금까지 잠적해 있다.

형집행정지 결정은 일선 검사의 의견에 크게 좌우되는 데다 의사를 매수해 허위 진단서를 제출할 경우 이를 제대로 검증하기가 어렵다. 부유층과 권력층이 악용하는 사례가 많아 끊임없이 유전무죄 논란이 일어나는 이유다.

지강헌이 '유전무죄'를 외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씨다. 당시 500만원을 훔친 지강헌의 형량은 17년인 반면 수십억원을 횡령한 전 씨는 7년이었다. 지강헌은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 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외쳤다. 전 씨는 2010년 5월 대법원에서 사기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만기 출소하려면 아직 2년이나 더 남아있지만 지금까지 수감생활을 한 것은 1년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2년간은 뇌경색을 이유로 형 집행정지를 받고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유전무죄의 아이콘이다. 대법원은 지난 1997년 부정축재 및 뇌물 혐의로 전 전 대통령에게 2천205억원의 추징금을 선고했다. 전 전 대통령은 '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고 주장해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미납 추징금은 아직까지 1천673억원이 남아 있지만 추징 시효가 오는 10월로 임박했다.

국가에 1천600억원이 넘는 돈을 내지 않고 대를 이어 호의호식한다면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전직 대통령의 추징금 문제를 거론하면서 미납 추징금을 환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박 대통령은 지난 4월 25일 '제50주년 법의 날' 기념식에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같은 부끄러운 말이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상용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헌법은 국민이 정해 놓은 최고 규범이다. 헌법 1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이 조문은 이제까지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 앞에 무력하기만 했다. 헌법이 더 이상 해묵은 유행어에 무릎을 꿇는 일이 없도록 하자. 국민 모두가 법 앞에서 평등하게 심판받는 그날까지, 국민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면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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