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을 밝힐 수 없는 국가정보원 요원의 활약과 로맨스를 코믹하게 다룬 영화 '7급 공무원'. 관객 수가 400만 명이 넘고, 영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까지 나왔으니 꽤 흥행한 영화임은 틀림없다. 이 영화의 성공 비결은 뭐니 뭐니 해도 기존의 통념을 깨는 비밀 요원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찌질함'이 아닐까 싶다. 으레 국가 요원이라 하면 무게감 있고 베일에 싸인 인물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영화 '7급 공무원' 속 주인공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영화에 지나친 '리얼'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무리이지만, 영화 '7급 공무원'의 국정원 요원은 찌질해도 너무 찌질했다.
유감스럽게도 국정원 요원이 영화 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찌질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바로 작년 연말 대선 과정에서 화려하게 등장했던 '국정원 댓글녀'의 출현이다. 최정예 국가 비밀 요원이 골방에 처박혀 소위 진보 성향 사이트에 '댓글 공작'을 하고 있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진 것이다. '공작'이라 말하기도 '웃픈'(웃기면서 슬픈) 블랙 코미디 영화 같은 '국정원 댓글녀' 사건은 지난 6월 14일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로 엄청난 음모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정치 스릴러로 변신하게 된다.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장의 지시에 의해 국정원 내부에 '심리정보국'이라는 부서를 통해서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작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보안을 생명으로 하고, '상명하복'이 규율인 공공 기관, 그중에서도 첩보 기관인 국정원의 직원 개인이 단독으로 정치 개입 활동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정원 댓글녀'가 활동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른 국정원 직원이 활동한 것이 확인되고, 지난 수년 동안 국정원장이 내부 인트라넷을 통해 정치 개입 인터넷 활동을 지시한 내용이 확인되었다. 최소 15개 이상의 사이트에서 조직적으로 여론 조작 활동을 진행한 것도 밝혀졌다. SNS를 통해 여론 조작을 진행하다 오타까지 그대로 퍼다 날랐다고 하니 얼마나 충실히 지침에 따라 움직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 박원순 서울시장을 '제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서울시장의 좌편향 시정 운영 실태 및 대응 방향'과 '반값 등록금'에 대한 반대 논리와 심리전 공작 계획이 담긴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로 파상 공세 차단'이라는 문건이 언론에 보도됨에 따라 우리 사회 전방위적으로 국정원의 정치 개입과 여론 공작이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명백한 사실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검찰 수사에 외압이 있다면 몸으로 막겠다"며 정당한 수사를 막아 나서고 있고, 수사 과정에서 사건에 대한 축소, 은폐를 지시했던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과 당시 국정원 수장이자 선거 개입의 책임자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구속 수사를 진행한다. 그야말로 '유권무죄'(有權無罪)이다.
우리 국민들의 법 집행을 담당하는 기관에 대한 불신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세간에서는 권력의 입맛대로 집권층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경찰을 가리켜 '견찰', 떡값을 받는 검찰을 가리켜 '떡검'이라고 한다. 이제는 국정원이 국가 정복을 꾀했다 해서 '국가정복원'이라 부를 지경이다. 모두가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할 '공'적 기관이 개인과 특정 집단의 '사'익을 위하기 때문이다.
최근 민심의 파도가 심상치 않다. 국정조사 청원 운동이 10일도 채 안 되어 11만 명을 넘어섰으며 대학생, 청년단체, 종교계 및 시민사회의 시국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켜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느닷없는 NLL 논쟁으로 '물타기'를 한다거나, 종북 좌파 세력이 배후에 있다는 '색깔론'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여론 조작이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논리는 '민주주의'와 '법치국가'의 근본정신을 훼손하는 말이다. 더 늦기 전에 국정조사를 진행하고 책임자와 관련자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진상'은 스리슬쩍 덮고 넘어가려 부리는 것이 아니라, 명명백백 밝히는 것이다.
박석준/함께하는 대구청년회 대표 adultbaby98@gmail.com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