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지켜보는 외국 사람들이 놀라는 것이 하나 있다. 천주교, 불교, 개신교 등 다양한 종교가 별 다툼 없이 서로 화합하며 세상에 사랑을 전하는 모습에 감탄을 하는 것이다. 각 종교에서 구심적 역할을 해 '종교의 본산'으로 일컬어지는 대구에서는 이 같은 종교 간 교류와 화합이 더욱 활발하다. 또한 항일운동 등 오랜 세월에 걸쳐 대구 종교계는 지역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1)천주교
'대구시사'(大邱市史)에 따르면 천주교가 대구에 들어온 것은 1837년이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을 두고 교인이 증가해 대구성을 중심으로 새방골(와룡산 밑 상리동), 날뫼(비산동 들복판), 신나무골(지천역과 신동 사이 연화동), 한티(칠곡 동명면 득명동) 등지에 교우들이 모여 살았다.
'대구본당 백년사'에 따르면 1886년부터 1900년까지의 15년 동안 신도수는 1만4천39명에서 4만2천441명으로 3배나 증가했다. 이 같은 교세 확장에 따라 1911년 경상도와 전라도는 조선대목구(朝鮮大牧區)로부터 대구대목구로 분리되고 1913'14년엔 주교관과 성유스티노신학교가 설립됐다.
대구대교구는 2011년 교구설정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도약을 위한 행사를 거행하기로 했다.
대구교구가 독립된 후 대구교구가 성립하는 데 가장 중요한 토지 기반을 마련하는 것에는 서상돈(徐相敦) 선생의 공이 컸다. 서상돈 선생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경상도에 살게 된 인물로 당대 거부로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제창하기도 했다. 남산동 일대의 천주교 부지의 기본이 된 토지를 내놨다. 여기에 교회가 안착해 교세가 확장되고 교육기관이 생겼으며 영남과 호남을 총괄하는 중심적 기능을 발휘했다.
1919년에는 주교좌성당이 축성됐고, 대구성당(계산본당)이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대구는 명실 공히 천주교에서 영호남의 중심이 됐다. 이 무렵 대구대목구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약 3분의 1 정도의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근대골목 투어에서 꼭 들르는 대구 중구 계산동 계산대성당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성당이다. 1899년에는 본당을 한옥으로 지었다가 1902년 근대 서양 건축양식으로 새롭게 건립했는데 서울, 평양에 이어 세 번째이며 영남지방에서는 최초이다. 1911년에 주교좌 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높이는 등의 증축을 해 1918년 지금의 모습으로 낙성했다. 영남지역에 천주교를 뿌리내리게 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곳으로 고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서품을 받은 곳으로 유명하다.
대구 중구 남산동 천주교 대구대교구청에 있는 성모당도 찾는 이들이 많다.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가톨릭 순례지인 루르드 성모굴의 크기와 바위의 세부적인 면까지 비슷하게 하여 세운 건물이다. 각 부의 비례 구성이 아름답고 벽돌짜임이 정교해서 지금까지 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관덕정 순교기념관, 계산대성당 등과 함께 많은 신자의 기도순례 장소가 되고 있다.
2)불교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대구가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웅숭깊다. 성철 스님 등 수많은 선승(禪僧)이 동화사 등 대구의 사찰과 암자에서 배출됐다. 대구 동화사 검당선원 조실이던 진제 스님이 대한불교조계종 종정(宗正)으로 추대된 것만 봐도 불교계에서 대구가 차지하는 비중을 쉽게 알 수 있다.
팔공산 자락에 있는 동화사(桐華寺). 동화사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자 팔공총림이다.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 등을 모두 갖춘 팔공총림 동화사는 종합수행도량으로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다.
오동나무가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것을 상서롭게 여겨 동화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봉황새를 상징하는 누각 봉서루 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당간지주 등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는 동화사에는 1992년에 조성된 아파트 12층 높이의 통일약사여래대불도 있다.
동화사는 창건 이래 보조국사 지눌, 사명당 유정 등 고승들이 머물며 실천불교의 역할을 담당해온 대가람이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금당선원에서 효봉, 성철 스님 같은 선승들이 오도(悟道)한 성지이기도 하다.
동화사와 함께 팔공산을 대표하는 불교 명소가 관봉석조여래좌상(갓바위)이다. 머리에 갓을 쓰고 있는 형상의 좌불상인 관봉석조여래좌상은 기도하는 사람의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소문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소망을 기원하고 있다. 해발 850m에 위치하며 높이는 약 6m, 머리의 갓 지름은 1.8m다. 신라 선덕왕 때 의현대사가 어머니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고 전해지며 머리에 쓴 갓의 모양이 대학 학사모와 비슷하다고 하여 입시철 합격을 기원하는 행렬이 해마다 북새통을 이룬다.
팔공산 남쪽 중턱에 자리 잡은 부인사는 대구 불교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고려시대에는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판각한 초조대장경을 보관하기도 했으며 이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선덕여왕과의 인연도 지니고 있는 부인사에서는 매년 선덕여왕을 기리는 숭모제가 열리고 있다.
3)개신교
대구 중구에 있는 제일교회는 대구경북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이다. 1898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대구경북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남성정교회를 세운 곳이 지금의 옛 제일교회 자리였다. 1907년에 전통과 서양 건축양식을 절충한 단층 교회당을 새로 지었고 1933년에 벽돌조 교회당을 지으면서 이름을 제일교회라고 했다.
제일교회를 설립한 아담스 목사와 동산병원 전신인 제중원을 설립한 존슨 선교사는 달성 서씨 문중으로부터 야트막한 산인 동산을 매입했다. 그 뒤 이곳에 학교, 병원, 신학대학이 들어서면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기지로 활용이 됐다.
개신교의 교세가 급속히 확산되자 선교사들은 경상북도 각지를 순회하며 교회를 설립했는데 1907년에는 그 수가 70여 곳에 이르게 됐다. 신명학교는 대구 최초의 여학교였다.
옛 제일교회는 대구를 찾은 내'외국인들이 찾는 명소다. 1937년에 5층 높이의 벽돌조 종탑을 세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외관 구성에서 고딕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각부 비례와 조적수법 등이 정교해 대구지역 근대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구에서 3'1운동을 앞장 서 주도한 것이 개신교였다. 대구에서 일어난 3'1운동은 1919년 3월 8일과 10일에 개신교가 중심이 됐던 것. 제일교회의 이만집(李萬集) 목사 등이 중추적 역할을 했다. 만세시위에 연루돼 투옥된 인사 가운데 6개월 이상 징역을 받은 사람의 거의 90%가 계성'신명 등 개신교 계통의 학생이거나 출신자들이었다. 그리고 1년 이상의 징역을 받은 주모자들은 전원이 개신교 교인들이었다.
대구 중구 동산맨션 옆에는 아흔 개의 오르막 계단이 있다. 이 길을 통해 곧장 가면 제일교회와 담을 경계하면서 동산의료원에 이르고, 동산의료원 내부 정원과 만나는 곳에 '대구 3'1운동 길'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피해 동산의료원 솔밭에 모였다가 서문시장으로 달려간 사실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