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무척 병약했다. 툭하면 병원 신세를 졌다. 병원을 방문하는 시간은 늘 새벽 1, 2시였다.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자다 깬 아버지는 불덩이 같은 아들을 들쳐업은 채 면 소재지 의원까지 깜깜한 밤길을 내달려야 했다. 무슨 병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자다가 일어난 부스스한 얼굴로 열을 재고, 청진기를 가슴에 대고, 엉덩이에 주사를 꾹 찌르던 의사의 모습은 아직 또렷하다.
소년의 어머니도 자주 아팠다. 한번씩 복통으로 방바닥을 뒹굴다가 병원으로 업혀 가곤 했다. 하루는 읍내 큰 병원을 다녀온 어머니가 자식들을 불러모았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병원에서 얼마 못 산다고 하던데, 너희들을 두고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느냐"고 되뇌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뇌혈관질환의 국내 최고 명의로 인정받고 있는 임만빈(65) 계명대 동산병원 석좌교수가 어렴풋하게나마 의사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순간이었다.
◆국내 최고의 뇌 수술 권위자
임 교수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뇌 수술의 대가다. 지금까지 뇌동맥류'뇌혈관 기형'뇌종양 등 6천건 이상의 수술을 시행했다. 2003년 대한뇌혈관외과학회 회장, 2006년 대한신경외과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국내 언론으로부터 수차례 뇌 수술 분야 명의에 선정됐다. 연구활동도 활발해 지금까지 150여 편의 논문을 냈으며 이 가운데 8편은 외국의 권위있는 잡지에 소개됐다. 국내 학회에서 시상하는 최우수 논문상'학술상은 물론 여러 번 받았다.
이달 24일 찾은 동산병원 교수연구동, 그의 연구실에는 '칼잡이 40년'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책장 맨 윗칸은 수술했던 환자들의 기록으로 빽빽하게 들어찼고, 족히 20년은 돼보이는 낡은 브라운관 TV 옆에는 수술 장면을 촬영한 비디오테이프가 수북하다.
"1981년 계명대에 부임한 직후의 자료는 아쉽게도 별로 없습니다만 1987년 이후의 수술 기록은 모두 갖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30여 년의 교수 생활이 저기에 다 담겨 있는 셈이죠. 경제적인 여유는 크게 없었지만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내고, 아픈 분들에게 건강을 되찾아주는 의대 교수로서의 삶은 보람있었습니다. 다만 가족들과 함께 한 시간이 부족했던 점은 아쉬운 대목인데 자식들도 이제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해 다행입니다."
임 교수는 충남 홍성 출신이다. 아흔인 노모는 아직 고향을 지키고 있다. 그런 그가 '대구 사람'이 된 것은 충청지역의 명문 고교인 대전고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조언 덕분이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어렸을 적 나와 어머니를 치료해 주셨던 분들을 생각했습니다. 진정한 의사가 되어 농촌 주민들이 아플 때 도와주고 싶었지요. 하지만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에 책값, 등록금이 많이 드는 의대 진학은 엄두를 내기 힘들었어요. 마침 경북대 사범대를 나온 담임 선생님이 등록금이 저렴하다며 경북대를 추천하셔서 대구에 뿌리를 내리게 됐습니다."
많고 많은 의대 전공 가운데 신경외과 전문의가 된 이유를 묻자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에는 '내외산소'(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과)가 인기였습니다. 저는 이시형 박사가 있던 정신과와 내과에 마음이 끌렸는데 결국 먹고 살기에 유리한 외과를 선택했습니다. 향후 산업화사회가 더욱 발달하고 교통수단이 늘어나면 다치는 환자가 많아져 신경외과 수요가 증가할 것이란 판단이었죠. 과장이 전공의를 직권으로 뽑던 시절이라 일반외과에 못 간 게 아쉽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엄한 스승, 자상한 의사
올해 3월 정년 퇴임한 후에도 한달에 4, 5번은 매스를 잡고 있는 임 교수는 2009년 '자랑스런 동산인 상'을 받았다. 군의관으로 병역을 마친 뒤 줄곧 몸담아온 계명대 동산병원에서는 환자뿐 아니라 직원, 동료 의사들의 신망이 두텁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큼은 엄한 스승으로 기억되고 있다. 전공의(레지던트) 초반에 겪었던 경험들이 몸에 밴 덕분이다.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환자가 숨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점을 제자들의 머리 속에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그가 잊지못하는 에피소드는 신경외과 전공의가 된 지 사흘만의 일이었다. 새벽 2시까지 응급실 환자를 치료하고 잠깐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중환자실에서 전화가 왔다. 머리를 다쳐 혼수상태로 수술받은 환자의 동공이 커졌다는 연락이었다. 당직실의 상급 연차 수련의와 함께 최선을 다했지만 환자는 곧바로 숨이 멈췄다.
아침에 상황을 보고하자 부과장으로부터 추상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네가 신경외과 의사가 되면 살리는 환자보다 죽도록 하는 환자가 많을 테니 당장 사표를 내라'는 질타였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30분을 빈 끝에 용서는 받았지만 6개월 간 병원 밖을 나가지도 못하고, 병실에서 거의 매일 밤을 새워야 했다. 인공호흡기가 없어 환자가 숨을 멈추면 밤새워 앰부백(손으로 작동하는 인공호흡장치)을 주물러 인공호흡을 시켜야하던 시절이다.
"그 환자는 지금 제가 치료해도 살릴 수가 없는 환자였습니다. 저를 혼냈던 선배도 그런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죠. 아마도 기강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이후 저 역시 환자가 사망하면 잘못 여부에 관계없이 일부러 전공의를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죽을 환자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의사가 해서는 안 될 일이지요."
평생 뇌 수술을 집도해오면서 기억에 오래 남는 환자들도 많다. 무려 서른여섯 시간 동안 수술했던 환자도 있었다.
"추석 전 산소에서 벌초를 하던 중 다친 환자였습니다. 제초기로 풀을 깎던 중 왼쪽 눈 밑이 따끔했는데 하루가 지나니 물체가 두 개로 겹쳐 보여 병원에 왔다고 하더군요. 두개골 사진을 촬영하니 약 15cm쯤 되는 철사가 튀어 뇌로 들어가는 내경동맥의 해면정맥동 부위에 박혀있었고요. 철사를 뽑으면 환자가 그대로 숨질 것 같아 수술에 들어갔는데 아침 8시에 시작해 다음날 정오 무렵에 끝이 났습니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 그런 힘든 수술은 안 합니다만 그 때는 체력이 좋았었나 봅니다. 허허허."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항상 강조해온 그가 암 수술을 동산병원에서 받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처음 폐암 진단을 받은 2006년은 물론 2011년 재발했을 때도 그는 서울 큰 병원에 가야 한다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쳤다.
"다른 환자들에게는 암이라는 말을 주저 없이 해주던 저도 환자가 되니 결국 그들과 다름없이 당황하게 됩니다. 왜 이런 병이 나에게 생겼을까 하는 원망도 일었죠. 하지만 저는 우리 병원 의료진을 믿었습니다. 서울 병원이 우수하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희 과의 경우 우리 병원이 우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의료진을 전적으로 믿고 치료를 받았으며, 지금도 건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수필로
임 교수는 '자상한 의사라는 평가가 있다'는 말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것 같다"며 손사래를 쳤다. "문학책을 많이 읽고, 환자의 입장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들에 동화해서 같이 아파하고자 했던 것 같기는 하다"면서 겸손해했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지키기 위해 평생 노력해온 임 교수의 삶은 그가 펴낸 몇 권의 수필집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는 2006년 수필가로 정식 등단한 뒤 '선생님, 안 나아서 미안해요' '자운영, 초록의 빛깔과 향기만 남아', '나는 엉덩이를 좋아한다', '병실 꽃밭' 등의 수필집을 냈다. '선생님, 안 나아서 미안해요'는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에 선정됐으며, 다수의 수필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어느날 중환자실로부터 환자가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방금 제왕절개를 통해 태어난 아이가 보육기에 담겨 있더군요. 반면 허겁지겁 도착한 중환자실에 있던 환자는 끝내 소생하지 못했고요. 연구실로 돌아와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니 삶이 너무나 허무해지더군요. 그때 마침 펼쳐든 신문에 실린 수필 공모 광고를 본 게 수필을 쓰게 된 계기였습니다. 글이라도 쓰면 조금은 마음에 위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죠."
의학용어집 사전과 함께 국어사전'영한사전'옥편을 끼고 사는 그의 수필은 대부분 환자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엉덩이, 의자, 견본 주택 등 남의 위에 올라서지 못하고 남을 받들다 일생을 마치는 것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글들도 많다. '자운영.....'에서는 치매를 앓다 작고한 부친에 대한 사무치는 정을 고백했고, '나는 엉덩이를 좋아한다'는 그 자신의 투병기다.
"훌륭한 의사는 큰 병을 앓아보아야 된다는 말에 동감하게 되더군요. 그동안 모아놓은 환자들의 자료를 보며 그들의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의사로 살아오면서 가졌던 가슴 저림과 아픔을 덜기 위해 썼던 제 부족한 글들을 주위 분들이 좋아하셔서 아직도 펜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 교수는 이달 15일 서울에서 열린 한국의사수필가협회 총회에서 제3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한국의사수필가협회는 수필 문학을 통한 의사'의학도의 인성교육 함양을 목적으로 2008년 설립된 전국 규모 단체다. 임 교수는 매일신문에도 '의창'이란 칼럼을 2008년부터 집필하고 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임만빈 교수는
1948면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홍성중'대전고를 거쳐 경북대 의대에서 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부터 계명대 동산병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신경외과 과장, 뇌연구소 소장, 의대 학장을 역임했다. 대한뇌혈관외과학회 회장, 대한신경외과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제15차 세계신경외과학술대회 차석 부회장을 맡고 있다.
2006년 폐암 진단을 받은 뒤 힘든 투병 과정 속에서도 강의를 계속 하면서 수필가로도 활동, 최근 한국의사수필가협회 회장에 선출됐다. 임 교수는 "암 수술을 받은 뒤 어머니가 걱정하실까봐 명절에도 고향을 가지않았는데 우연히 수필집을 읽으신 뒤 어머니께서 건강에 좋다며 칡뿌리즙을 보내주셔서 가슴이 먹먹한 적이 있다"며 "아흔의 노모에게 아직도 걱정을 끼쳐드리는 불효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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