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5년 전이었다. 1998년 6월 하순. 직장 앞에는 전투경찰이 버티고 서 있었고 사무실은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그 길로 실직자가 되어버린 이기창(66·대구시 수성구 신매동)씨. 그의 나이 50을 막 넘길 때였다.
그의 손에는 반년 치 월급밖에 되지 않은 퇴직금이 들려있었고 노후를 위한 준비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퇴직금이 야금야금 줄어들자 마음이 급해졌다. 남의 말 만 믿고 서둘러 가게를 차렸으나 삼년을 버티지 못하고 빚만 남긴 채 접어야했다.
이씨는 술과 담배로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기력마저 떨어졌다. 죽음이 떠올랐다. 2001년 긴 겨울밤은 그렇게 힘들게 지나가고 있었다.
잠 못 이루는 밤 우연히 잡은 책 한 권이 한 줄의 불빛처럼 다가왔다. 구원의 빛이었던 셈이다. 책을 보며 텃밭이 떠올랐고 그 밭은 오래전 퇴직하면 농사를 짓겠다며 사둔 것이었다. 다음날 바로 밭으로 향했다. 흙을 만지면서 그는 건강을 찾았고 희망도 덩달아 얻었다.
이씨는 지금 정말 행복하다고 했다. 나락에서 건져 올린 희망, 그 실체가 궁금했다.
-그렇게 행복한 이유가 무엇인가.
"정말 힘든 시기를 보내봤기 때문에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값진 것이며, 어제와 같은 오늘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게 됐다. 그러니 매일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가장 좋아하는 말이 '건강은 일 가운데 있고, 행복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일어나면 밭으로 나가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작은 가게에서 시간을 보낸다. 단순한 삶을 살고 있다. 좋은 사람과도 만난다. 당연히 행복할 수밖에 없다. 어려움이 행복해 지는 방법을 깨닫게 해주었다."
-50대 초반 느닷없이 실업자가 됐을 때 충격은 굉장했겠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것도 날벼락인데 순순히 협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경찰에 고발까지 당했다. 50을 갓 넘긴 가장이 빈손으로 대학생 자녀를 공부시키고 가정을 꾸려가야 한다는 현실에 기가 막혔다. 두렵고 겁도 났다. 잠도 오지 않고 먹지도 못할 만큼 좌절과 분노 허탈감이 몰려왔다. 당연히 술과 담배로 울분을 달랬다. 동료들 중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6개월 뒤에 체인점을 오픈했다.
"반년이 지나니 퇴직금까지 없어질 판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생계대책을 마련해야한다는 절박감에 남의 말만 믿고 경험도 없는 피자 체인점을 열었다. 얼마 남지 않은 퇴직금에다 집을 담보해 빌린 돈으로 시작한 사업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남의 손에 주방을 맡겼고 내 나이에도 맞지 않은 일이었다. 피자배달을 나가면 손님들이 나를 보고 다시는 주문을 하지 않았다. 대부분 젊은 고객들이었으므로 내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결국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살던 아파트를 처분해 빚을 갚고 경산 변두리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임대주택까지 흘러들어갔다.
"아이들을 봐서라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창업교육도 받았다. 하지만 적은 자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자연히 술을 찾게 되었고 몸에 이상이 생겼다.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 나의 처지를 맨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속된 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았나.
"바로 한 권의 책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잡았던 책이 바로 스콧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이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십 수 년 전 사놓은 수성구 삼덕동에 있는 텃밭이 생각났다. 가보니 아카시아 밭이 돼있었다. 연장을 준비해서 아카시아와 잡목을 캐내고 매실나무를 심기로 했다. 매일 흙과 가까이 하니 입맛이 나고 기력이 좋아졌다. 2002년 봄에 매화나무와 자두나무를 심었다. 일을 하니까 밥을 찾게 되었고 몸이 고되니까 불면증이 사라졌다. 흙을 대하며 건강한 몸과 정신을 찾았다. 오늘도 밭에 나가 매실을 수확 했다."
-좋은 일도 생겼다.
"2002년 3월 아내의 지인이 다구점을 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했다. 피자집으로 된통 당한 탓에 신중히 결정했다. 우선 나이에도 맞고 조용한 성격인 우리부부 모두에게 적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평소 많았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다 많은 돈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2002년 시지에 가게를 열었다. 큰 돈은 벌지 못했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년 뒤 2004년 8월 현재 가게로 다시 이사를 했다."
-생활이 안정되면서 취미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버킷리스트라고 해도 좋을 목록을 만들었다. 우선 시니어클럽에서 하는 숲 생태지도자공부를 지원해 대구수목원에서 3년 넘게 숲 해설사 일을 했다. 또 도산서원 부속 선비수련원에서 하는 전통예절 지도사 공부를 했고 2년에 걸쳐 아내와 함께 다도공부도 했다. 열심히 배웠다."
-수필가로 등단도 했다.
"우연히 글 쓰는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2009년부터 수필공부를 시작했다. 원래 책을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쓰는 것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2010년 수필 '찻 사발 예찬'으로 등단했다. 이어 백산문학제 산문 우수상도 수상했다. 이른 아침 농장에서 일을 끝내고 가게서 글을 쓸 때면 참으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올해 안으로 나의 수필집을 낼 계획이다."
-창업하려는 이들에게 해줄 말도 많을 것 같다.
"잘 아는 직종을 선택해야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창업을 하기 전에 현장서 반드시 배우고 익히는 시간을 가져야한다는 것이다. 6개월에서 1년 정도 직접 가게에 가서 부딪쳐 봐야한다. 근처 음식점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간판이 다섯 번 바뀌었다. 모두다 처음 시작한 사람들이다."
-건강은 일속에 있다고 했다. 당신에게 일은 어떤 의미인가.
"일은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을 갖게 한다. 일이 없으면 몸과 마음이 황폐해지기 쉽다.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은 없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지금이라도 은퇴자들이 일자리를 찾았으면 한다. 나이가 많으면 나이 값만큼의 대우를 받겠다고 생각하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고급두뇌를 써야하는 일은 젊은이에게 주고, 거칠고 기본적이고 몸을 쓰는 일을 찾으면 된다. 많은 돈을 벌려고 하면 리스크가 그만큼 커진다. 땀으로 하는 일들을 찾아서 기대를 낮추면 일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힘든 시절을 버티게 한 가장 큰 버팀목은 무엇인가.
"아내다. 내가 힘들어할 때 나를 몰아붙이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옆에서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만 했던 아내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이제야 생각하게 된다. 한 결 같이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준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가족이 가장 큰 힘이 됐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김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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