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잠에서 깨어나는 21세기 실크로드] <제3부> 13.노천 박물관 이스탄불

트로이·에페스·비잔틴·오스만제국…몰락한 왕국 유산 세계 관광객 '유혹\

약 1천500년 전에 연인원 1만 명이 동원돼 완공한 성 소피아 사원. 이 건조물이 겪어 온 수난은 이스탄불이 겪어 온 역사의 풍상을 함께 보여준다.
약 1천500년 전에 연인원 1만 명이 동원돼 완공한 성 소피아 사원. 이 건조물이 겪어 온 수난은 이스탄불이 겪어 온 역사의 풍상을 함께 보여준다.
고대 로마의 도시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는 에페소 유적지. 특히 샐수스 도서관 앞은 많은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고대 로마의 도시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는 에페소 유적지. 특히 샐수스 도서관 앞은 많은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트로이 유적지 입구에 서 있는 트로이 목마 속에 들어간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트로이 유적지 입구에 서 있는 트로이 목마 속에 들어간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탁심 광장과 연결된 이스티크랄 거리는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번화가인데 정치적인 모임이나 시위가 열리기도 한다.
탁심 광장과 연결된 이스티크랄 거리는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번화가인데 정치적인 모임이나 시위가 열리기도 한다.

참 먼 길을 거쳐 아시아 대륙의 맨 서쪽 끝까지 왔다.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인구 1천200만명이 살고 있는 이 도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 사이에 걸쳐있다.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의 교차로이며 고대와 현대가 동시에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역사가 토인비는 이스탄불을 가리켜 '인류문명이 살아있는 거대한 노천 박물관'이라고 했다. 많은 위대한 제국들이 이 도시를 바탕으로 몰락하고 발전하는 역사과정을 반복했다. 이스탄불 시민들은 제국이 남긴 다양한 문화의 도가니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택시들이 1천500년 전에 건설된 성 소피아 성당 옆을 지나가고 연인들은 천 년 전 로마제국의 성벽 옆을 산책한다.

이스탄불은 원래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의 도시국가였다가 로마영토로 편입되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서기 330년 이곳을 동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하고 이름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었다. 5세기경 서쪽의 로마는 몰락한다. 동쪽으로 수도를 이전한 것이 역사의 흐름을 바꾼 셈이 됐다. 콘스탄티노플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가 됐고 비잔틴 제국은 천 년 동안 번성했다. 중국의 사서에도 대진국(大秦國)으로 그 기록이 남아있고 실크로드의 서쪽 기점으로 교역도 활발했다.

로마의 황금기에 들어간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유명한 성 소피아 성당이 건축됐다. 연인원 1만 명이 동원돼 5년10개월 만에 완공했다. 본당으로 들어서면 중앙 돔을 중심으로 이슬람 문자가 새겨진 큰 원판이 눈에 들어온다. 예언자 무함마드를 비롯한 이슬람 지도자의 이름이다. 사람들은 한 변이 77m인 정사각형 내부와 15층 높이의 거대한 돔의 규모에 압도된다. 그러나 이 건조물이 겪어 온 수난은 이스탄불 또는 터키가 겪어 온 역사의 풍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204년 십자군 원정 때 많은 수도원과 교회가 불타는 수난을 겪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고 도시이름도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파괴될 위기에 처해졌으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대신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는 운명이 됐다. 건물 주위에 첨탑이 세워지고 내부의 모자이크 성화는 회벽으로 덮였다. 오늘날 터키공화국에 들어와 아야소피아 박물관으로 개방되면서 벽의 칠도 벗겨졌다. 기독교의 성화와 코란의 금빛 문자가 혼재되어 있다.

터키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륙의 접경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고대로부터 수많은 왕국이 역사 속에 등장하고 사라져갔다. 그중 이스탄불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트로이 유적과 에페소 유적은 전 세계로부터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트로이는 호메로스의 대서사시에 나오는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해져 전설 속의 도시로만 알려졌는데 발굴 작업 끝에 유물의 출토로 실제 도시임이 입증됐다.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발굴로 여러 시대의 유적이 중복되어 있음이 밝혀졌고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1996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고대 로마의 도시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는 에페소 유적도 관광객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기원전 5세기에는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았다가 알렉산더 대왕이 주인이 되기도 했다. 도시의 가운데를 통과하는 도로 바닥에는 대리석이 깔려있고 2만4천 명을 수용한다는 원형극장도 있다.

이스탄불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아시아와 유럽사이의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배를 타고 돌아보는 크루즈 투어를 경험하기도 한다. 선착장에서 유럽 쪽 해안으로 출발해 돌아올 때는 아시아 쪽 경관을 보며 운항한다. 크루즈를 마친 사람들은 '그랜드 바자르'로 향한다.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아시아의 물품은 이곳을 통해 유럽으로 흘러들어갔고 유럽의 재화도 아시아로 전하는 국제교역의 메카였다. 오스만 제국시기인 1461년에 조성됐는데 점포 5천 개 규모의 터키 최대의 시장으로 온 종일 북적인다. 이스탄불에서 많은 시민들이 찾는 곳 중에는 신시가지의 탁심 광장도 유명하다. 상업과 쇼핑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광장으로 정치적인 모임이나 시위가 열리는 곳이다. 광장과 연결된 이스티크랄 거리는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최고의 번화가이다. 빨간색의 전차 트램만이 천천히 오가는 보행자 천국 도로이다.

이스탄불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여러 역사의 층이 마치 벽돌처럼 층층이 쌓여있는 도시 위를 걷게 된다. 어디서든 과거와 현재가 충돌한다. 사라진 로마의 궁전 위에 오스만 제국의 모스크가 서 있다. 오늘날, 아파트 건물이 과거 고대 로마제국의 지하 저수조 위에 건립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1천700년 전 이스탄불이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됨으로써 시작됐다. 중요한 것은 한 도시가 파괴 될 때마다 다음 세대는 과거의 폐허위에 과거를 능가하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는 점이다.

글·사진: 박순국(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sije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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