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에 여성 의료인력이 필요하다는 알렌의 요청에 따라 정부는 관기 중 어린 소녀 몇 명을 뽑았다. 하지만 근대적인 여성 의료인을 꿈꿨던 이들의 역할은 4개월도 못돼 끝나고 말았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대한의사학회(大韓醫史學會)에 발표한 이꽃메, 황상익의 논문 '우리나라 근대 병원에서의 간호(1885~1910)'의 내용을 정리해 본다.
정부(제중원을 관장한 정부 부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현 외교부)는 황해도와 평안도 감영에 공문을 보냈다. 제중원에 필요한 관기를 차출해 올리라는 명이었다. '기녀 중 나이 13~16세로 총명영오(聰明潁悟)한 2, 3명을 뽑아올려 제중원으로 보내 의술 일을 배우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선은 관례상 관기 중에서 의녀를 선발해 왔다.
이렇게 선발된 소녀 5명은 1885년 8월 5일 제중원에 도착했다. 알렌은 이들에게 여자 의학생(female medical students )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알렌에 따르면, '이들 기생은 총명하고, 필요한 기술 습득에도 퍽 영리'하여 간호원과 약제사 임무를 맡겼다. 그럼에도 불구, 의녀의 전통대로 여성의료인과 의례 담당 관기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길 기대했다.
5명의 관기들도 기대에 따랐다. 이들은 도착한 날 알렌의 집에서 열린 연회에서 술도 따르고 권주가도 부르고 가야금도 탔지만 알렌은 아무런 이의를 표하지 않았고, 오히려 며칠 뒤 제중원 만찬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그런데 의학생이자 간호사이자 약제사였던 이들은 어떤 이유인지 확실치 않으나 '병원에 있는 것이 혼란을 가져왔다'는 알렌의 요청에 따라 해직되고 말았다. 이때 해직된 관기는 2명이었던 것 같고, 나머지 3명은 12월 1일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중국의 군인'정치가로 1885년 11월 21일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부임)에게 팔려갔다.
이에 대해 알렌은 '남아 있는 3명의 영리한 기녀는 너무나 값비싼 사치품인데 위안스카이에게 팔려갔다. 이들은 비탄과 향수병에 몸부림치고 있었고 이들을 만날 수조차 없는 이들의 어머니들은 나를 찾아와 그들을 구해줄 것을 계속 졸라대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관에 속해 있지만 일을 할 줄 모르며, 내 집에 살게 해 준다면 기꺼이 하녀가 되겠으며 내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는 언제든지 따라가겠다고 한다. 돕고는 싶지만 불가능하다'라고 기술했다. 결국 이로써 1885년 8월 5일 제중원에서 시작된 어린 관기들의 다기능 여성의료인으로서의 활동은 미처 4개월도 채우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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