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무명칼럼] 공공의 적

10년도 더 된 살인 사건(여대생 H양 청부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실타래처럼 풀려 나오는 추잡한 이야기 탓에 네티즌들이 난리다. 5월 말 본편 방송이 나가고 온 국민의 속을 한 번 뒤집어 놓은 데 이어 지난 토요일 이어진 속편 방송이 국민들을 다시 한 번 부글부글 끓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사회 곳곳의 구린 데가 더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건의 당사자들 모두는 한마디로 '인간이 아니었다'는 게 네티즌들의 일치된 반응이다. 검색어 1위를 장식한 것은 물론 관련 글이나 영상은 댓글로 도배되고 있다. 물론 댓글의 내용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거칠다. 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신상 털기'까지 한창이다. 네티즌들의 요구는 하나같다. 나쁜 짓을 한,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을 '제대로' 응징하라는 것이다. 돈 많다고, 힘세다고, 백 든든하다고 봐주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세상을 향해 욕을 퍼붓고 있다.

그래선지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전전 정권과 전 정권 그리고 현 정권까지 모두 사건의 당사자가 돼 있는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를 둘러싼 여야 정치권의 싸움판도 뒷전이다.

소설이나 영화 이상으로 드라마틱하고 엽기적이다 보니 웹툰에서 좋은 소재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의 주범인 모 기업 사모님은 엽기 그 자체다. 도를 넘어도 너무 많이 넘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지나쳐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을 저질러 놓았다. 그 결과는 본인도, 가족도, 주변도 풍비박산이다. 남의 가정을 파괴시켰으니 마땅히 받아야 할 죗값을 치러야 하는 법. 그런데도 무기수가 대수냐며 교도소 밖을 활보하고 다니며 사회를 조롱했다. 그 대단한 돈으로.

이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두 달 전에 강우석 감독의 영화 '공공의 적'이 개봉됐다. 돈 때문에 부모도 죽이는 '나쁜 놈'을, 꼴통으로 찍힌 경찰인 '강한 놈'이 응징한다는 이야기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지만 불과 두 달 뒤 벌어진 일은 영화보다 훨씬 영화 같았다.

국민들은 이 영화를 보고 열광했다. 왜일까?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복수도 하고, 죄인을 응징도 할 수 있어서다. 영화 '공공의 적'의 성공은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국민을 열 받게 하는 '거리'는 정말 무궁무진하다. 서민들은 돈이 없다고, 지위가 낮다고, 힘이 약하다고 치이면서, 불이익을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나쁜 ×들은 염치도 없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더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다.

민간인들뿐이겠는가? 공직 사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높을수록 더하다는 걸 청문회는 보여주었다. 한 번 하고 나면 "멀쩡한 × 하나 없다"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들보다 더 힘세고 더 돈 많은 사람들의 행태는 국민들을 더 좌절하게 만든다. 가관이다. 그들에게는 형제도 없고 친척도 없다. 법도 그들의 돈과 힘 앞에서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돈이 권력인 사회에서 돈 많은 건 미덕이자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는 유용한 도구이지 죄악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돈과 권력은 많고 그 양에 반비례해서 도덕성이 낮은 사람들이 사회에 미치는 해악은 엄청나다. 저들은 우리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근본부터 뒤흔든다. 이 사회는 법과 질서 그리고 구성원들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저들은 신뢰를 무너뜨리고 법과 질서를 비웃는다. 남의 시선이나 비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저들이 지금처럼 준동하는 한, 저들의 준동에 대한 제약이 지금처럼 제대로 내려지지 않는 한 이 사회의 견고함을 기대할 수 없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돈 많고, 힘센 사람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바라지도 않는다. 저들을 사회 지도층이라거나 이 사회의 상류층이라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과 의무만이라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라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이 사회의 '내구연한'은 훨씬 짧아질지도 모른다.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지 않고 소 닭 보듯이 하는 사회가 튼튼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저들은 사회의 안녕을 해치는 공공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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