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의리파 가수 최남용의 쓸쓸했던 삶(하)

남 돕는 데 앞장섰지만 정작 자신은 곤궁한 생활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한 최남용 앨범의 곡목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돈바람 분다' '황금광(黃金狂) 조선' '조선의 봄' '비오는 선창' 등 80여 곡이나 됩니다. 태평레코드사에서 발표한 마지막 곡은 1938년 6월의 '홍등야화'(紅燈夜話)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 보더라도 30여 곡을 발표했던 빅터사보다 무려 여든 곡 넘게 발표했던 태평레코드사가 가수 최남용의 실질적인 터전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39년에는 오케레코드사에서 '통사정' 등 4곡을 발표합니다. 1939년 12월에 발표한 '눈 쌓인 십자로'가 최남용이 가수로서 발표했던 마지막 곡입니다. 그러니까 최남용이 식민지 가요계에서 활동했던 기간은 도합 7년 남짓한 세월입니다.

1939년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박기채 감독이 이광수의 원작소설 '무정'(無情)을 영화로 제작하게 되었는데 이때 최남용은 형식의 배역을 맡아 주연배우로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시인 김안서가 작사한 주제가 '무정'을 직접 불렀습니다. 여주인공 영채 역에는 배우 한은진이 출연했고, 그 밖에 조연으로는 김신재, 이금룡, 김일해 등의 이름도 보입니다. 이후 일제 말에는 주로 영화계와 그 주변에서 머물며 친일영화 '반도의 봄'(1941) 주제가를 직접 작곡했습니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지난날 특별한 사랑을 받던 가수로서의 기억은 점차 그 자취가 엷어져가기만 했습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최남용은 무궁화악극단을 조직해서 공연을 다녔습니다. 말하자면 극장 쇼 무대의 프로모터로서 남다른 기질을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당시 1세대 가수 채규엽(蔡奎燁)이 자기관리에 실패해서 몹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최남용은 선배가수를 돕는 공연을 열었는데 그 수익으로 채규엽의 삶에 새로운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1946년 7월에는 서울 동양극장에서 무궁화악극단 주최로 특별한 공연 하나가 막을 올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했던 여성가수 박향림(朴響林) 추모공연입니다. 이 공연의 전체기획과 진행을 가수 최남용 선생이 맡았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최남용은 대구로 피란 내려와 당시 대구 육군본부 휼병감실(恤兵監室) 소속의 군예대(KAS) 조직사업에 앞장섰고, 정훈공작대의 기획실장으로도 일했습니다. 이후 영화제작 일을 계속하게 되었을 때 배우지망생 김경자가 최남용의 절대적인 후원 속에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김경자가 정식으로 예명을 만들게 되었을 때 은인이었던 최남용을 아버지처럼 생각해서 최지희(崔智姬)로 지었다고 합니다.

최남용의 일생을 돌이켜보면 고보 학업을 채 못 마친 상태에서 쌀장사를 하다가 문득 가수의 길로 접어들어 빅터, 태평 두 레코드사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다가 영화계로 활동 방향을 바꾸어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지만 별반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평소 남을 돕는 의리파로서의 명성은 높았어도 정작 자신의 삶은 늘 곤궁하고 쪼들리기만 했습니다. 1967년 최남용은 회갑도 되기 전에 뇌일혈로 쓰러져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던 최남용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슬하에는 일점혈육도 없는 채로 1970년, 쓸쓸한 병상에서 회갑을 맞이한 최남용은 오직 부인 윤난성(尹蘭星) 여사 혼자서만 머리맡을 지키며 흐느끼는 가운데 한 많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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