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한 유명 동양학자는 신문 칼럼에서 '수백 년 된 종가의 종손은 유교문화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문화재로 대접해야 한다'고 썼다. 종가가 잘 보존되려면 종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사실 종손은 직장을 갖기도 어렵고, 거주 이전의 자유를 누리기도 힘들다. 집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다. 보는 눈이 많은 까닭에 행동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無忝堂 '보물 411호)의 주인 이지락(45) 씨의 삶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다만 젊은 신세대 종손답게 자녀들을 영어'수학학원에도 보내고, 이따금 폭탄주도 즐긴다.
"경기도에 있는 1사단에서 병역을 마쳤는데 저는 군대 갈 때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태어나서 대구경북을 벗어난 게 처음이었거든요. 그런데 자대에 배치받고 보니까 고참이 고향 중학교 동창이더라고요. 결국 회재(晦齋) 할배(이언적 선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거죠. 하하하."
◆조상에 욕되지 않는 삶이 화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이달 1일 오후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 하얀 모시 두루마기 차림의 이 씨가 대청마루에서 반갑게 맞았다. 그런데 악수를 청하는 손이 이내 무색해졌다. 자리를 잡자마자 이 씨가 절부터 한 까닭이다. 맞절을 하는 동안 교양 부족을 눈치 챘을까 봐 걱정부터 앞섰다.
이 씨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의 17대 손이자 여강 이씨의 종손이다. 27세 때 선친을 여읜 뒤부터 줄곧 양동마을을 지켜오고 있다.
"'무첨'은 시경(詩經) 소완(小宛)의 '夙興夜寐(숙흥야매) 無忝爾所生(무첨이소생)'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한밤에 잠자리에 들며, 널 낳으신 부모님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회재 할배의 손자인 이의윤(李宜潤) 공이 호로 사용하면서 당호(堂號)가 됐는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제게도 평생 화두인 셈입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고택이 주는 무게감은 낯선 객(客)에게도 위압적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양동(良洞)의 정서를 체득해야 했던 그에게 종손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저의 존재를 알고 만나는 분들은 항상 제 손을 꽉 잡습니다. 큰 신뢰를 보내주시는 것이지요. 제가 거기에 맞게 행동하는가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종손이기 때문에 누리는 이 특별한 혜택만큼 책임을 다하고 있나를 늘 생각합니다. 이제는 종손으로서 부담감을 많이 떨쳐냈지만 솔직히 어렸을 때는 많이 힘들었지요. '몸 공부'를 벗어날 길이 없었거든요."
종손이 해야 할 일은 많다. 그 가운데에서도 손님을 맞는 일을 뜻하는 접빈객(接賓客)은 첫손에 꼽히는 의무다. 더욱이 한 해 방문객이 45만6천 명(2012년 기준)에 이르는 유명 종택이라면 잠시 쉴 틈도 없을 법하다. 2시간여 동안 이어진 인터뷰 중에도 무첨당을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기 위해 가능하면 시간을 냅니다. 하루 서너 번은 다과를 차려 내지요. 나름대로는 민간 외교'홍보사절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마케팅을 위한 홍보는 사양하고 있습니다. TV 예능'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도 여러 차례 촬영을 제의해왔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이 씨는 이 대목에서 관광객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껍데기만 보고 가는 형식적 관광이 되지 않도록 미리 '준비운동'을 하고 오셨으면 합니다. 요즘 크루즈여행이 인기라던데 누구는 배 안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기면서 최고의 시간을 보내지만 그렇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그 긴 시간이 괴롭게만 느껴질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외국에서도 예전에는 우리 마을의 생활에만 관심을 보였지만 요즘에는 철학'도덕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고 합니다."
◆한학자로서 영남 선비 재조명
종가의 종손은 혈연집단의 핵심이다. 족보를 연결고리로 하는 수만, 수십만 명의 지손들과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 종손들이 보학(譜學)과 사서삼경에 능통한 것도 자연스럽다. 사서삼경을 알아야만 조상과 '대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씨 역시 한문학을 전공했다. 동국대에서 한문학으로 학사'석사 학위를 받은 뒤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동국대와 한동대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한국국학진흥원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4년 전부터 영남선현문집 번역 작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계 장사경, 매헌 금보, 무첨재 정도응 선생의 문집을 펴냈고 지금은 매산 정중기 선생의 글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안동에 있는 국학진흥원에 다녀오지요. 전국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남 선비 10여 분을 재조명할 계획입니다."
이 씨가 어려서부터 한학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교를 졸업한 뒤에는 대구지역 한 대학의 산업복지학과에 진학했다.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객지 생활이었다. 자식만큼은 종손의 책임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던 선친의 '배려'였다.
그러던 그가 한문의 세계에 빠져든 것은 선친이 남긴 '유언 아닌 유언' 때문이었다. "선친께서 작고하시기 얼마 전 '원조오잠'(元朝五箴'보물 제526호)을 한 번 번역해 보라고 하시더군요. 원조오잠은 회재 할배가 지은 잠언을 읽고 크게 감명받은 퇴계 이황 선생이 쓰신 글입니다. 그 이전에도 향교에서 한문을 배우기는 했지만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우리 옛것을 지키는 것도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박사 과정까지 마치게 됐습니다."
종손인 만큼 이 씨는 크고 작은 문중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나간다. 대구경북지역 불천위(不遷位'나라나 유림에서 그 삶과 업적이 후세인들이 영원히 기리며 본받을 만하다고 인정한 인물) 종가 종손들로 구성된 영종회(嶺宗會) 같은 모임에도 참여한다. 접빈객과 함께 종손의 가장 큰 책무인 봉제사(奉祭祀'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일)는 물론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 드는 비용도 적지않다.
"종손들은 어떤 프레임 속에 갇혀 살기 마련이지요. 특히 저 같은 경우에는 전국의 종손들 가운데 젊은 편이라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문중에서 '품위 유지비' 조로 도움을 주시지만 그래도 생활비는 제가 벌고 있습니다."
◆신세대 종손이 사는 법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말이 있다. 서로 뜻이 잘 맞거나 행동이 일치하는 부부를 가리킨다. 슬하에 2남 1녀를 둔 여강 이씨 종손인 이 씨와 종부(宗婦)인 신순임 씨도 그렇다. 신 씨의 친정은 평산 신씨(平山 申氏)의 수백년 세거지인 청송 중들마을이다.
조상 공양에 대한 부담이 막중한 종손으로서 결혼이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 씨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원래 혼인이란 문화와 문화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사람과는 중매로 만났지만 둘 다 어릴 적부터 이런 문화를 잘 알기 때문에 굳이 여러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인연을 서로 빨리 만난 셈이지요."
부인 신 씨는 시인이기도 하다. '무첨당의 5월'(2011년)과 '앵두세배'(2013년) 등 두 권의 시집을 냈다. '무첨당의 5월'은 종부로서 양동마을의 삶을 서정적으로 그려냈고, '앵두세배'는 친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앵두세배'란 시집간 딸이 정월 세객 맞느라 너무 바빠, 앵두가 익을 무렵에야 그 익은 앵두를 따서 친정으로 세배를 가는 것을 말한다.
이 씨는 스스로를 '16세기 집에 사는 21세기 평범한 가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인근 포항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해 손수 운전을 해서 등하교시키고, 가족 여행도 자주 가는 편이다. 가끔은 아들과 함께 술잔을 나누기도 하고 노래방도 즐긴다.
"오고 가는 차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학교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이죠. 하지만 답이 아니라 주로 제 경험을 전해줍니다. 아이에게 일방적 신호만 보내는 '스토커 사랑'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아이들의 성적에 화낸 적도 없던 것 같습니다. 미래의 행복과는 관계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죠. 제 아들도 언젠가는 종손의 역할을 해야겠지만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면 아무 문제가 없겠죠."
가사일을 돕는 것도 신세대 종손답다. 현실에 맞게끔 기제사를 초저녁에 지내도록 바꿨고, 제사상 준비도 많이 돕는다. 이 씨는 1년에 기제사 8번과 불천위 대제(不遷位 大祭) 2번(이언적 선생 내외)을 치른다. 가장 큰 행사인 대제는 20일 이상 준비하는데 술도 직접 담근다.
"제가 20대 때부터 양동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은 누군가는 종가 문화의 존재 이유를 재해석하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농경사회의 흔적인 종가 문화를 직접 체험하면서 다듬는 게 진정성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는 '숙련'도 필요하지만 역동성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외형적 보존이 잘된 저희 마을도 존재 이유를 유지하지 못하면 껍데기만 남겠죠."
글'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이지락 종손=1968년 양동마을에서 태어난 이 씨는 마을 입구에 있는 양동초교와 경주의 안강중, 문화고를 거쳐 동국대에서 한문학으로 학사'석사 학위를 받은 뒤 경북대에서 한문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의 객원연구원으로 옛 선비들의 문집을 번역하는 일을 맡고 있다. 오는 10월에는 미국 브리검영대학에서 회재 이언적 선생과 관련한 특강도 가질 예정이다. 이 씨는 "해외여행은 난생처음"이라며 "한국의 유교문화가 외국 석학들의 연구대상이 돼 종손으로서 무척 기쁘다"고 했다. 단전호흡과 공인 2단인 검도가 취미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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