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버지 체면 내려뒀더니… 더 든든해진 '아빠'

경제위기·대량퇴직 시대 맞물려 집에서 위안 받고 힘 얻자 분위기

아빠들이 안방극장에서도 맹활약을 하고 있다. 한 방송사의 예능프로그램
아빠들이 안방극장에서도 맹활약을 하고 있다. 한 방송사의 예능프로그램'아빠 어디가'
영화
영화 '월드워 Z'

대한민국 아빠들이 호출당했다. 영화나 드라마, 현실에서도 아빠를 찾기 시작했다. 아빠만 나오면 영화관엔 관객이 들고 TV 프로그램 시청률이 쑥쑥 오른다. 한동안 '모성애 과잉'과 '부성애 결핍' 현상을 보이던 한국 사회에 아빠가 '핫 코드'로 떠올랐다. 그동안 가정에서 푸대접받았던 아빠들로서는 많이 당황할 정도다. 현실에서 무기력한 아빠라도 대중문화 속에서만은 '영웅'이 되고 있다.

◆아빠가 돌아왔다

인생은 팍팍하지만,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우리네 아빠들. 스크린 속 아빠들의 인생은 여전히 청춘이다. 올해 첫 1천만 영화인 '7번 방의 선물'은 2013년 아빠 신드롬의 신호탄이었다. 여섯 살 지능의 아빠가 보여주는 절대적인 딸 사랑에 1천200만 관객이 울고 웃었다.

영화 '전설의 주먹' 속 아빠들은 현시대의 아버지상을 보여준다. 한 때는 일대를 주름잡는 전설의 주먹이었던 소년들이 축 처진 어깨의 40대 아빠가 됐다. 무서울 것이 없는 이들에게 자식들은 가장 무서운 존재다. 잘났건 못났건 아빠의 역할에 충실해지려는 이들의 모습이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최근 개봉한 '런닝맨'의 젊은 아빠 차종우(신하균 분)는 스크린 속을 달리고 달렸다. 하나뿐인 아들 때문이다. 우연히 태운 손님으로 인해 전 국민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살인 용의자가 됐다. 그러나 '아들에게 부끄럽게 살인자로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악당들과 맞서 싸운다. 호기심을 가장 두려워하는 겁쟁이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크루즈 패밀리.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해가 지면 식구들을 동굴 안에 가두는 '부정'으로 흥행 중이다.

지난달 개봉한 '뜨거운 안녕'은 죽음을 앞두고 이별을 준비하는 호스피스병원이 배경. 시한부 딸과 마지막을 보내고 싶어 하는 아빠 '봉식'의 이야기가 눈물샘을 자극하고 있다.

외국이라고 아빠의 사랑이 다를까. 할리우드에서도 아빠들이 맹활약 중이다. 흥행 수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 '월드워 Z'. 주인공 제리 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 좀비의 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한다는 거창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 같지 않다. '슈퍼맨'의 쫄바지와 망토도 '아이언맨'의 철갑 옷도 없는 그는 결코 영웅이 아니다. 예측할 수 없는 좀비의 습격을 받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그가 사력을 다하는 이유는 오로지 가족 때문이다. 지난해 말부터 힐링영화로 사랑받은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도 딸 바보 장발장이 입양녀 코제트를 위해 헌신하는 내용으로 관객의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문화 코드로 급부상

'아빠 어디가' '남자의 자격' '땡큐' 등 예능프로그램들도 아빠들이 접수했다. 아버지들이 그들의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리얼 다큐멘터리로 꾸민 '아빠, 어디가'는 예능프로그램의 대세로 떠올랐다. 올 들어 최고의 시청률을 보인 주말 드라마 '내 딸 서영이'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부성애를 그려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아버지의 애끊는 연기 덕에 시청률은 40%를 넘어섰다. 서점가도 아빠 바람이 불고 있다. 아빠의 육아 경험을 펴낸 '나는 아빠다'를 비롯해 '아빠 휴대폰이 없을 땐 어떻게 통화했어요''아빠와 함께 배우는 기술원리 및 산업기술사 3종' 등이 나왔다.

영화평론가인 조희문 인하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는 "아버지가 문화적인 코드로 떠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7년 경제위기가 닥치자 아버지가 등장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아버지가 등장한다. 집 밖에서 어려움을 겪는 아버지는 가정에 더 의지하게 되고 가족들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똘똘 뭉쳐 강한 아버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버지에 힘을 주고 싶어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윤병철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 등과 맞물려 아버지의 위상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특히 베이비 붐 세대가 본격적인 퇴직을 시작하면서 위축된 아버지들을 격려한다는 측면에서 아버지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고 했다.

아버지의 호칭이 '아빠'로 바뀐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문화소비층에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아버지. 집에서는 외로운 가장이던 아버지의 이미지가 친근한 '아빠'로 변화하고 있다. 조희문 교수는 "최근 아빠 코드의 등장은 예전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추락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거나 용기 잃은 아버지를 응원하는 측면과 함께 '변화하는 아버지상'에 대한 요구도 담겨 있다"고 했다. 조 교수는 이를 '프레디'라는 말로 설명했다. '프레디'는 프렌즈(friends)와 대디(daddy)의 합성어로 '친구 같은 아버지'를 의미한다. 최근 불고 있는 '아빠 열풍'의 이면에는 이 같은 '프레디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현실에서도 맹활약

현실 속 아빠들도 맹활약 중이다. 아이들과 함께 캠핑을 가거나 함께 놀아주고 요리도 해주는 아빠들이 늘고 있다. 특히 엄마의 전유물이었던 '육아'도 아빠의 몫으로 돌아왔다. 좋은 아빠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아빠 학교'도 인기다. 특히 어린아이까지 아빠를 찾기 시작하면서 '스마트맘'(smart mom) 열풍 못지않은 '아빠 앱'이 부상했다.

기자가 스마트폰에서 '아빠'라는 단어를 입력해 보니 10여 개의 육아 앱들이 등장했다. '아이즈 플러스' '키즈노트' 등 아이들과 아빠를 실시간으로 연결해주는 앱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아빠와 만드는 낱말놀이'는 처음 우리말을 시작하는 자녀와 함께 낱말 카드를 만들 수 있는 놀이 앱. '미루아빠의 육아일기'는 아빠의 시각에서 본 새롭고 신선한 육아 정보가 가득하다.

기러기 아빠들을 위한 앱도 있다. 무료국제전화 앱 '슈퍼비'. 이 앱은 기러기 아빠들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국제전화를 이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4살 난 쌍둥이 아들을 키우고 있는 김진형(38'대구 수성구 지산동) 씨는 스마트폰 한쪽에 아예 아들을 위한 폴더를 하나 만들었다. 김 씨는 "아내가 유통업계에서 일해 주말에 혼자서 아이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아빠 앱이 필수여서 아예 따로 앱 폴더를 만들어 다닌다"고 했다. 아빠와 자녀들이 함께하는 프로그램은 항상 문전성시. 1998년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개설된 두란노아버지학교에는 15년간 3천400여 명의 아버지들이 다녀갔다. 최근에는 53기생들이 참좋은교회(수성구 파동)에서 교육을 마쳤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사목국 가정담당이 주관하고 있는 '성 요셉 아버지학교'는 아버지들의 화해와 용서, 치유와 행복 등을 통해 건강한 아버지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 학교 관계자는 "처음에는 아빠들이 아이들과 노는 것을 어색해하다가도 마칠 때쯤 되면 아이들과 매우 가까워진다. 아이들도 아빠와 함께할 수 있어 좋아한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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