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족끼리 '세계일주'…티격태격, '몰랐던' 가족과 뜨거운 재회

◇가족끼리 '세계일주' 돈·시간 쓰고 남는 것은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그 때, 캐나다가 나를 불렀다' '세상 어디에도 없던 곳~'.

항공사의 광고 카피는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던 원초적 본능을 교묘히 끄집어낸다.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고 싶다는 충동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관련 업계의 '뽐뿌질'(부추김의 은어)이 아니더라도 여행은 듣기만 해도 설레는 말이다. 게다가 그 여정이 세계일주라면? 주사위를 던져 그림판 위에서 세계를 돌아다니는 '블루 마블'(Blue Marble) 게임조차 '역마살'을 재촉하기 마련이다. 어릴 적 세계지도를 보며 상상했던 지구 반대편의 나라들을 향해 직접 떠나는 이들을 만나봤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 순간에 충실하라)

경북 청도 출신인 김도연(36) 씨는 3년 전 결혼한 남편 강종훈(39) 씨와 함께 현재 호주를 여행 중이다. 총 16개월 예정의 세계일주 가운데 아시아에 이어 두 번째 대륙이다. 강 씨는 지난 5월 출국에 앞서 다니던 회사를 2월에 그만뒀고, 김 씨는 4월부터 휴직한 상태다.

강 씨 부부는 결혼 전에 세계일주를 약속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한 것은 올해 초였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떠나야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6천만원 정도로 예상하고 있는 경비는 그동안 모아뒀던 적금을 털어 마련했다. 여행 후 재취업 때까지 필요한 생활비 정도는 남겨두고 출발했다. 집은 원래 없었다.

강 씨 부부는 두 달 동안 미얀마'태국'라오스'베트남'캄보디아'말레이시아를 둘러봤다. 남은 여정은 호주'인도'이란'터키'북아프리카'아프리카 종단'남아프리카공화국'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과테말라'멕시코'미국'서유럽'북유럽'러시아 순서다. 귀국 때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이용, 극동지역까지 다녀올 계획이다. 국가 이동 순서만 대략적으로 잡아놓고 필요에 따라 수정하기도 한다.

김 씨는 "다니다 보니까 나이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반비례하는 것 같다"며 "세계일주를 꿈꾸고 있다면 가능한 한 일찍 떠나길 권한다"고 조언했다. 또 "비용이 걱정인 20대라면 '워킹 홀리데이' 제도를 이용하면 될 것"이라며 "평생을 두고 볼 때 여행하는 1, 2년은 긴 시간이 아닐 테지만, 그 시간이 있고 없음은 나중에 큰 차이가 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경북 문경의 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신경외과 전문의 한동로(54) 씨는 지난해 3월부터 올해 1월까지 가족과 함께 세계일주를 다녀왔다. 인천'아프리카'동유럽'서유럽'남유럽'미국'중남미'뉴질랜드'인천 순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이었다. 부인 이경숙(53) 씨와 막내아들 정인(15) 군은 전체 일정을 함께했고, 차남 정빈(22) 씨는 지난해 7월부터 합류했다. 영국에서 어학연수 중이던 장남 정재(25) 씨는 유럽 일정만 참여했다.

전체적인 일정 마련과 항공권'숙소 예약 등은 한 씨가 1년 동안 틈틈이 준비했다. 남미를 여행하면서는 익숙하지 않은 언어 때문에 과테말라에서 6주간 스페인어 교습을 받기도 했다. 전체 비용은 1억원이 조금 넘었다.

한 씨는 "처음에는 아내와 막내아들이 학업 중단을 걱정하면서 반대했지만 더욱 깊어진 가족 간의 정을 얻고 돌아왔다"며 "세계일주를 목표로 세웠다면 비용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무조건 떠나라"고 충고했다. 한 씨는 특히 "여행을 통한 우연한 만남과 수없이 많았던 곤경이 가족들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다"며 "가장으로서 나머지 구성원의 단독성을 인정하지 않는 '전체주의 아빠'에서 이제 조금 벗어난 것 같다"고 했다.

◆여행이 주는 선물들

프랑스 작가 쥘 베른(1828~1905)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등장하는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는 세계일주를 떠나기에 앞서 상세한 계획표를 작성하지만 곳곳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부딪힌다. 우여곡절 끝에 세계를 완주하고 상금 2만파운드를 받지만 비용을 제하고 나면 실제로 얻은 금전적 소득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행을 통해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익을 얻었다. 평생의 반려자와의 사랑이었다.

세계일주를 다녀온 이들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에 하나도 '여행 동안 많이 싸우지는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결혼 3년차 신혼인 김 씨 역시 두 달간의 여행 동안 생각보다 많이 다퉜다고 했다. 김 씨는 "한국에서 살 때는 싸우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나와보니 그렇지 않았다"며 "서로가 자기 몫을 해야 하는데 아직 제가 잘 못해서 분위기를 망칠 때가 많다"고 했다.

숙소, 음식점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가격 대비 만족도가 낮은 경우가 많았던 것도 싸움의 단초가 된다. 김 씨는 "안 그래도 낯선 곳에서는 예민해지는데 숙소까지 부실하면 날카로워지기 마련"이라며 "장기 여행이다 보니 얼마 되지 않는 돈도 굉장히 크게 느껴진다"고 했다. 김 씨는 그러나 "남편과 결혼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더 자주 든다"며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옛말처럼 사랑이 더욱 단단해졌다"고 귀띔했다.

가족이 함께 떠났던 한 씨도 의견 불일치로 불편해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럽 여행에서 미술관 관람을 최우선 목표로 정하고 무거운 미술책도 여러 권 가져갔지만 정작 아이들은 아빠의 생각과 달랐다. 익숙하지 않은 일들을 겪으면서 한 씨 혼자서 힘들어한 시간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왕좌왕, 좌충우돌, 티격태격하면서 가족은 서로를 더욱 배려하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한 씨는 "여행 50일쯤 되니까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면 여행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여행은 평소에는 몰랐던 가족들의 목소리를 듣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떠나는 이들은 다양한 경험을 쌓아 평생의 이야깃거리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부러움 반 걱정 반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껴 쓴다 해도 1년 정도의 세계일주를 하면 1인당 수천만원은 들고, 가족의 수입이 사라지는 기회비용까지 생각하면 1억원은 훌쩍 넘어가기 마련이다.

이에 대해 한 씨는 "은행통장 잔고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며 "가족과 함께 즐겁게 지내기도 짧은 게 우리 인생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한 씨가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한 달만 여행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던 장남과의 소주 한잔이었다.

◆일정'비용 꼼꼼히 검토해야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 여행자는 포르투갈 태생의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1480~1521)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세계일주 여행 바람을 일으킨 건 유명 여행가 한비야(55) 씨의 저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1996)이었다.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처럼 부자들이나 할 수 있는 호사(豪奢)로 여겨졌던 고정관념이 깨진 계기였다. 이후 2000년대부터는 관련 정보를 나누는 인터넷 카페 등이 활성화되면서 세계일주는 소시민들의 '버킷 리스트'(평생 꼭 해보고 싶은 일)에도 올랐다.

세계일주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꼼꼼한 준비가 필요하다. 여행 루트 확정, 항공권 구입, 여행지 정보 조사, 언어 습득 등이 기본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가고 싶은 곳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방문 지역이 많아질수록 비용도 증가하는 만큼 여러 차례의 검토를 거쳐 골라야 한다. 이후에는 개별 국가들을 여행할 때 며칠씩 머무를지를 정하면 된다.

항공권은 대한항공이 속해 있는 '스카이팀', 아시아나항공이 포함돼 있는 '스타얼라이언스' 등 각 항공동맹체들이 내놓은 세계일주 티켓을 구입할 수도 있고, 개별 항공권을 구입할 수도 있다. 한 씨는 영국항공 등이 주축인 '원월드'의 세계일주 비행 티켓을 이용했고, 김 씨는 개별 항공권을 구입해서 여행 중이다. 두 방식 모두 장단점이 있어 자신의 여행 일정'콘셉트에 맞춰 선택하는 게 바람직하다.

세계일주는 대부분 한국에서 출발, 시계 방향으로 세계를 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해야 시차 적응이 쉽고 시간 손실이 적기 때문이다. 항공권을 제외한 생활비는 여행 기간, 국가, 숙소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대략 1인당 하루 5만(개발도상국)~15만원(선진국)으로 잡는다.

비용을 줄이는 방법도 있다. 항공기 탑승, 신용카드 사용 실적에 따른 항공 마일리지(대한항공 이코노미석 기준 세계일주 14만 마일)를 사용할 수도 있고 전 세계를 누비는 저비용 항공사를 이용할 수도 있다. 각 기업체가 벌이는 마케팅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삼성증권은 이달 말까지 상장지수펀드(ETF)를 온라인으로 거래한 고객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세계일주를 보내주는 행사를 벌이고 있고, 하나투어는 지난 5월에 세계일주 항공권 증정 이벤트를 벌였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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