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100세 시대, 은퇴의 재발견] <2부>행복한 은퇴자들 ⑭신바람 퇴직자 최주원 씨

대구 찬가 악보 복사해 만나는 사람마다 나눠줘

대구 찬가인
대구 찬가인 '능금 꽃 피는 고향'이란 노래를 알리기 위해 직접 동영상을 만들만큼 열심인 최주원 씨. 그는 이 노래가 노래방에서 불러질 수 있도록 만든 주역이기도하다.
일본의 화과자가 일본의 대표과자이듯이 한과가 한국을 대표하는 과자가 되는 것이 최 씨의 꿈이다. 그는 이를 위해 연구소를 차릴 만큼 열심이다.
일본의 화과자가 일본의 대표과자이듯이 한과가 한국을 대표하는 과자가 되는 것이 최 씨의 꿈이다. 그는 이를 위해 연구소를 차릴 만큼 열심이다.

은퇴한지 2년. 그는 그동안 살이 빠졌다고 했다. 직장 다니느라 못했던 일들을 하나둘씩 하느라 바빠 체중이 줄었다고 했다.

우선 그는 대학생이다. 가난 때문에 못한 공부가 한이 돼 퇴직하고 바로 사이버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또 우리전통과자인 한과 보급을 위해 한과연구소를 열었고 어릴 때부터 한과를 접해야한다는 생각에서 한과 급식 디저트 공급을 위해 열심이었다.

35년을 농업직 공무원으로 근무한 최주원(62'대구시 동구 불로동) 씨. 말수가 적고 수줍음을 탈 것 같은 첫 인상과는 달리, 인터뷰를 시작하자 자판을 두드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만큼 그는 보여줄 것도 많았고 알리고 싶은 것도 많았다.

최 씨는 지금도 대구능금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움직이고 있고 대구지역 전통을 보존하고 애향심을 기르기 위한 새로운 모임도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엔 이해하기 어렵던 그의 오지랖 넓음에 점차 고개가 끄떡여졌다. 나중엔 그의 열정에 신명까지 났다.

-왜 그렇게 바쁜가.

"현역일 때도 일이 주어지면 뿌리를 뽑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모두들 퇴직 하면 무엇을 할까 궁금해 할 정도였다. 그만큼 관심분야도 많았고 열정도 대단했다. 시키는대로 하기보다는 무엇을 기획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 보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머릿속에는 계속 생각들이 떠오르고 있다. 그걸 손과 발이 옮기려다 보니 바쁜 것 같다."

-아이디어가 많은 듯하다.

"머리가 좋아서 아이디어가 많은 것이 아니다. 하는 일에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아랫사람들에게 혹은 자식들에게 일찍부터 사진 배우기를 권했다. 사진을 찍다보면 사물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기고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열정과 애정의 출발점이다. 관심이 있어야 아이디어가 나온다."

-대구찬가인 '능금 꽃 피는 고향'이란 노래와의 인연도 열정에서 비롯된 것인가.

"2008년 가을 김범일 시장이 대구능금집단재배단지인 평광동을 방문했을 때 웃으면서 노래방에 대구 노래인 '능금 꽃 피는 고향'이 없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직접 노래방에 가보니 없었다. 아예 저작권협회에 등록도 되어있지 않았다. 등록을 위해 악보를 구하러 다녔으나 악보조차 없었다. 레코드판도 찾기 어려웠다. 다행히 국립도서관에 악보가 있었고 우연히 LP판도 구했다. 모든 게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2009년 2월 드디어 전국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레코드판과 악보를 구했을 때 기분이 대단했겠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국립도서관에서 길옥윤 씨가 1971년 당시 직접 음표를 달고 가사를 쓴 육필 악보(그는 그렇게 추정하고 있었다)를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지금도 그 악보를 복사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누어주고 있다. 물론 패티김과 친해지는 계기도 됐다."

-이 노래비 건립에도 관여하고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능금 꽃 피는 고향'이란 노래는 대구의 노래다. 노래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지난 3월 발족되면서 앞서 소개한 인연으로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지난 5월 총회가 열릴 때 패티김을 초청했다. 그녀는 노래비 건립에 대해 아주 좋아했고 총회 행사장에서 이 노래를 직접 부르기도 했다. 10월에 노래비가 제막된다."

-대학생이라고 했다.

"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가지 못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대학교를 가려 했다. 그런데 여의치 않았다. 아들과 딸이 대학 갔을 때 함께 공부하려 했으나 일 때문에 또 시기를 놓쳤다. 퇴직을 하고 바로 사이버대학에 입학했다. 지난해 3월 입학했는데 하루 2시간 강의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학교행사라면 체육대회나 각종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내가 최고령 학생이어서 모두들 '형님'이라고 부르며 반긴다. 자랑 같지만 성적도 좋은 편이다. 졸업하고 4년제 대학에 편입하면 역사를 전공하고 싶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역사는 우리의 뿌리이고 정신이다. 지금도 밤마다 역사 공부를 하고 있다. 딸과 아들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얼마 전 중학교 국사교과서를 10페이지 분량으로 요약하는 작업을 끝냈다. 앞으로 고등학교 교과서를 공부해 더욱 충실하게 만들면 나만의 압축된 역사책이 완성될 것이다."

-최근에 역사와 관련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의 역사를 너무 모른다. 안타깝다. 그래서 이번 광복절에 맞춰 동구 평광동에 있는 광복소나무를 관리하고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모임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광복송(光復松)은 1945년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평광동 단양우씨 집성촌에 심어진 소나무다. 처음에는 세 그루였으나 그중 한 그루가 살아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를 가꾸고 보호하고자하는 모임이다. 회칙은 이미 만들어 두었다. 이번 광복절에 이 소나무 앞에서 행사를 하며 모임을 시작할 생각이다."

-한과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 됐나.

"재직 중 일본에 출장 갔을 때 화과자가 일본 최고의 관광 상품인 것을 보고 우리 유과를 우리나라 대표과자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은퇴하고 난후 연구소를 차렸다. 앞으로 많이 연구해야한다. 어릴 때부터 우리과자뿐 아니라 우리 것을 접할 기회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급식에 한과를 넣고 싶은 것이다. 현재 한과공장의 고문 역할도 하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더 있나?

"공무원연금공단 소식지에 10년 후 내가 무엇이 되어있을까라는 글을 투고한 적이 있다. 그때 한과 보급에 앞장서는 사람과 함께 농촌을 알리는 해설사가 되어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이가 더 들면 농촌을 알리고 소개하는 해설사를 하고 싶다. 이를 위해 지난해부터 마을해설가 과정과 체험지도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퇴직해서도 바쁘다. 가족의 반응이 궁금하다.

"아내는 이미 오래전 포기했다.(웃음) 미안하다. 하루 종일 아내 혼자 집에 있어야하니까. 그래도 할 수 없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이 도움이 된다면 모든 일을 뒤로하고 달려갈 것이다. 그것이 공무원의 자세다. 퇴직해 보니까 공무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수필 공부를 하고 싶다. 그리고 자서전도 만들 계획이다. 그냥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정리하고 쓰면서 내가 살았던 한 시대를 기록하고 싶다."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사진: 김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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