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이 설립한 최고 의료기관이던 대한의원은 1910년 8월 29일 국권을 빼앗긴 뒤 9월 30일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바뀌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를 통해 의사, 산파, 간호부를 양성했다. 원래 대한의원에 있던 한국인 간호부 견습생 9명이 이곳의 첫 간호학생이 됐고, 이들은 일본어와 간호학을 배운 뒤 1911년 3월 3명이 졸업했다.
◆대구동인의원 시절부터 간호부 양성
지역에서 정식으로 간호 교육이 시작된 것은 1913년 4월 21일부터다. 대구와 평양 등지의 자혜의원에서 간호부를 양성토록 규정을 바꾼 것. 대구를 비롯한 전국 13개 자혜의원에서 의원별 정원 12명씩 간호부를 양성했다.
관립 대구자혜의원에 앞서 전신 격인 대구동인의원도 간호부 교육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구동인의원은 산파와 간호부를 키워내기 위해 한국인과 일본인 공학 양성소를 개설했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통역을 통해 가르쳤다고 한다. 수업 연한은 대한의원의 사례에 비춰볼 때 1년으로 추정된다. 교육과정이나 배출 인원 등은 명확지 않다.
1907년 2월 대구동인의원이 설립된 이래 이곳에서 일한 간호부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20~25명이 내과, 외과, 소아과 등의 외래에 배치돼 낮 근무 후 야간에는 숙직제로 병실 4곳에서 투약'주사 처치'기타 업무를 맡았다.
간호 교육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곳에 입학할 만한 사람도 적었고, 희망자는 더욱 적었다. 나이, 소양, 일본어 등 자격을 갖춘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 1911년 초 전국의 자혜의원 간호학생은 모두 20명에 불과했다. 활성화를 위해 학비를 지급했지만 학생은 늘지 않아서 1913년에도 17명에 그쳤다.
그러던 중 1913년 4월 21일부터 도 자혜의원에서 간호부를 양성토록 규정이 바뀌면서 대구, 평양 등 전국 13개 자혜의원에서 1년 6개월의 수업기간으로 의원별 정원 12명씩 간호학생을 둘 수 있게 했다.
그 뒤 1914년부터 조선총독부는 '간호부 규칙'을 만들어, 우리 역사상 처음 간호인력 면허를 부여했다. 무시험(관립 및 지정 간호교육기관 졸업자)과 시험(미지정 간호교육기관 졸업생)으로 나뉘었다. 자혜의원 졸업생은 무시험이었다.
◆간호부 지원자는 늘 부족한 상태
이런저런 노력에도 지원자는 늘 미달이었다. 자혜의원뿐 아니라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과도 마찬가지였다. 지원자가 적었던 이유는 ▷일본어를 아는 학생만 모집했는데 전 국민 초등교육이 실시되지 않아 그런 자격자가 적었고 ▷10대 후반~20대 초반 여학생은 당시 결혼 적령기여서 진학을 꺼렸으며 ▷병원에서 남자 환자를 직접 접촉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고 ▷기초과학이나 의술도 모르는 상태에서 해부나 수술에 대한 부담이 컸기 때문이었다.
1916년 9월 28일 자 매일신보 3면에는 광고가 하나 실렸다. 제목은 '간호부생도 모집광고'이고 내용은 '10월 21일에 간호부과 입학생도를 모집함. 대구자혜의원. 상세는 당원에 내문함을 요함'이라고 돼 있다.
특히 1917년 4월 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조선총독부의원 및 대구'평양 자혜의원에 간호부 양성을 위탁함에 따라 대구자혜의원은 주요한 간호원 양성기관으로 자리 잡게 됐다. 하지만 정확한 간호부 숫자나 교육 기간, 교육 과정 등은 자료 부족 탓에 잘 알 수 없다. 여건이나 예산 등의 어려움으로 제대로 교육하기 어려웠고, 매년 신입생을 뽑지도 못했다.
1921년 3월까지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던 곳은 9곳에 불과했다. 조선총독부의원 졸업생은 107명, 9개 자혜의원 졸업생은 80명으로 모두 합쳐서 187명에 불과했다. 이는 1921년 전체 간호부 582명의 32%에 해당한다.
대구의 경우 졸업생은 2명(입학 지원자 및 허가자도 2명)에 불과했다. 당시 광주 16명, 진주 10명, 춘천 12명, 함흥 33명을 배출한 것에 비해 훨씬 적은 편이다. 이처럼 대구자혜의원 간호부가 적었던 이유는 명확지 않다.
평양자혜의원도 2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입학 지원자는 10명, 허가자는 5명으로 대구보다 많았다. 다만, 1921년 조사 당시 시점에서 대구자혜의원의 생도는 14명으로 평양 27명, 함흥 19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편이었다.
◆대구자혜의원, 간호부 양성 중심지로
전국 관립의원에서 간호교육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간호부 부족은 해결되지 않았다. 1920년 간호부 숫자는 526명으로 의사 1천35명의 절반에 불과했다. 간호부 1명당 인구는 무려 3만2천 명을 헤아렸다. 조선총독부의원과 전국 19곳에 이르는 자혜의원의 간호부 정원은 459명에 이르렀지만, 이들 중 186명이 결원이어서 진료 차질이 불가피했다.
결국, 입학연령을 만 14세로 낮추고, 장학금도 1인당 20원 이내로 올렸다. 대구자혜의원 등 5개 관립의원에 간호부양성소도 설치했다. 정원을 늘려 인근 지역에도 간호부를 공급하도록 한 것. 조선총독부의원(정원 150명)은 경기도'강원도'황해도를 맡았고, 대구자혜의원은 두 번째로 많은 정원 90명으로 경상도와 충청북도의 간호부 공급을 맡았다.
한국과 일본 간호부의 자격 차이가 있었다. 일본 간호부의 한국 내 면허는 인정됐지만, 거꾸로는 안 됐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내무성과 협의해 1922년 간호교육 입학자격과 수업연한 등을 일본과 같은 수준으로 조정했다.
이처럼 간호교육을 바꾸면서 간호부 수준도 높아졌고, 인적 공급도 확대됐다. 조선총독부의원(1920년 10월~1928년 3월)은 335명을 배출했고, 대구를 비롯한 도 자혜의원은 여건에 따라 매회 10~20명의 입학생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간호부의 근속연수는 길지 않았다. 1926년 당시 조선총독부의원 간호부의 근속연수를 보면, 120명 간호부 중 3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11명에 불과했다. 근무 여건도 열악하고, 결혼 적령기가 되면 대부분 그만두었다. 아울러 박봉에 시달렸다. 관'공립 병원이나 대형 선교병원의 경우 월급이 30원 정도였고, 사립병원은 10원 정도에 불과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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