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더 빨리, 더 많이

얼마 전 한 부장판사가 아파트 층간 소음 문제로 갈등을 빚던 위층 주민의 자동차 열쇠구멍을 파손하고 타이어에 구멍을 내 경찰에 입건됐다가 퇴임한 일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판사의 자질 문제가 또 한 번 도마 위에 올랐다. 법정 막말 파문, 각종 탈선 등 잊힐 만하면 터지는 판사들의 기행'비행으로 동료 판사들과 법원이 속앓이를 하고 있지만 그때마다 속만 끓이다 끝날 뿐이었다.

사실 대법원은 국민과의 간격을 좁히고 이미지 변신을 위해 몇 년 전부터 '소통' '열린 법원' 등을 기치로 내걸고 변화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간 법원이 가졌던 권위, 불통 등의 이미지 대신 국민과의 소통을 통한 '열린 법원' '함께하는 법원'으로 다시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움직임 중 하나가 바로 '더 많이, 더 빨리'다. 국민을 위해 판사들에게 '더 많이 듣고'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더 빨리 사건을 처리하라'며 요구하고 독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더 많이 들어주고, 더 빨리 사건을 처리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하루하루 당장 처리해야 할 사건 수가 많다 보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 판사는 "재판 건수가 더 늘어나는 현실과 더 많이 들어주고, 더 빨리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이상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 있다"며 "지금도 매일 쏟아지는 사건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판결문 쓴다고 밤늦게까지 야근하기 일쑤인데 이 상황에서 더 많이 듣고 배려하려 해도 말처럼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판사는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거나 재판 과정에서 불필요한 말이 길어지고 많아질 때면 쫓기는 마음에 속된 말로 '돌아버릴 지경'"이라며 "많이 들어줘야 한다는 생각과 계획된 시간 안에 마쳐야 다음 기일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고, 다음 재판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상충할 때면 마음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고 했다.

'인성'이 훌륭한 판사를 뽑기 위해 아무리 인사 기준을 강화한다 해도 많은, 그리고 다양한 사람이 모인 직업, 조직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100% 만족할 수 있는 채용 인사란 있을 수 없는 게 사실이고, 판사 세계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임관 후의 인사 관리 문제는 다르다. 판사 세계가 아무리 '수평 조직'의 대명사여서 '위에서 아래로의 통제'에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있는데도 이를 계속 방치해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 조직이라는 대법원이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한 번 재임용 심사를 받으면 10년 뒤에나 다시 심사를 받는 등 재임용 심사 간격이 긴데다 이마저도 평가 구실을 제대로 못 한다면 그 평가 제도는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다. 1998년 재임용 제도 도입 후 25년간 탈락한 사람은 5명뿐이라는 숫자도 이를 잘 나타낸다. 또 판사로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면 변호사 개업 등 퇴임 후 진로에 불이익을 주는 방안도 검토해 현직에 있을 때 판사로서 언행에 더욱 신중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국민에게 다가가는' '국민의 마음을 얻는' 법원이 되기 위해선 원시적인 조직 관리 체계에서 벗어나 더 획기적이고 효과적'현실적인 인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또 구호로만 그치지 않고 진정으로 '더 많이' 듣고, '더 빨리'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방안도 치열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고,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지금이 그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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