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기록물은 고정된 실체인가

명숙이와 세나가 싸운다. 명숙이가 세나에게 삿대질을 한다.

"세나 너, 왜 물리 선생님한테 자꾸 알랑거려? 오늘 물리 선생님 책상에 꽃 꽂아둔 거, 네 짓이지? 내가 물리 선생님 좋아한다고 고백한 날, 네가 무조건 밀어주겠다고 맹세한 거 벌써 까먹었니?"

세나도 만만치 않다.

"내가 언제 그랬는데? 몇 월 며칠에 그랬는데?"

"너! 딱 걸렸어."

명숙이가 일기장을 가지고 와서 세나의 눈앞에 들이댄다.

1987년 3월 5일 자 일기는 제목부터가 '세나의 맹세'.

오늘은 6월 8일. 명숙이의 일기장은 바로 어제인 6월 7일분까지 단 하루도 빠진 날이 없다.

"임세나, 한 입으로 두말하기야?"

세나는 대답을 못하고 씩씩거리기만 한다. 반 친구들이 일제히 세나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내가 학창 시절에 실제로 목격한 일을 이름만 바꿔서 써본 이야기다.

그날, 나는 알았다. 기록하는 자한테는 당할 수 없다는 진리를.

우리 역사에서 기록의 여왕으로 첫손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다. 그녀는 본디 기억력 자체도 범상치 않았던 모양이다. 정조가 경연장의 신하들에게 "우리 자궁께서는 젊어서부터 한 번 보거나 들으신 것은 종신토록 잊지 않으셨으므로 궁중의 고사로부터 국가의 제도, 타성의 씨족에 이르기까지 기억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셨다. 내가 혹시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면 질문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질문하였을 경우 역력히 지적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으셨으니, 그 총명과 박식은 내가 감히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그러나 누가 혜경궁 홍씨의 운명을 부러워하랴. 남편(사도세자)이 요즘 같은 복더위에 뒤주에 갇혀 쪄 죽었고 친정 또한 풍비박산이 났다. 그 모진 세월에 혜경궁은 을 썼다. 몸은 비록 세월을 이기지 못했지만, 그녀가 남긴 피눈물의 기록은 세월과의 싸움에서 진정한 승리자로 등극했다.

에는 철종이 "혜경궁의 괴로워하신 마음과 지극한 슬픔에 감격의 눈물이 절로 떨어졌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은언군의 손자로서 혜경궁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어리숙한 강화도령(철종)이 혜경궁의 고통에 감응할 수 있었을까.

영국 작가 마거릿 드래블이라면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독특한 매력의 내러티브" 덕분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드래블은 "혜경궁 홍씨의 특별한 경험과 자신의 비극적 삶을 회고하는 그녀의 내러티브에 매료"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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