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모든 것 하나하나 핫 이슈.'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생활의 일부가 되면서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들은 개인의 일상을 소개하는 인증샷으로 넘쳐난다. 특히 '카스'(카카오스토리)가 활성화되면서 '인증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남다른 장소를 가도, 신기한 물건을 보아도, 심지어 새로 나온 라면을 먹어도 사진과 글을 올리는 것은 필수. 단순히 자신의 존재나 삶을 인증해 보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증을 넘어 '인정중독 시대'다. 하루라도 인정받지 못하면 불안하다. 이들에게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건 '악플'(악의적 댓글),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무플'(댓글이 없는 것)이다. 댓글과 인정에 목마른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인증 혹은 인정의 시대
"뭐해. 술맛 떨어지게." "미안 미안, 카스 댓글 좀 달고…." "카스라니. 갑자기 무슨 맥주 이야기야." 며칠 전 대학동기와 오랜만에 술잔을 나누던 이진화(가명'42) 씨. 고민을 털어놓으려고 했지만 기분만 상했다. 직장'가정 문제 등 한참을 하소연했지만 친구의 대답은 건성이었다. 급기야 소주잔이 채워지기가 무섭게 비우던 친구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요즘 유행하는 카스가 맥주 상표인 줄로만 알았던 이 씨. 자신의 고민보다는 카스에 푹 빠진 친구가 너무 야속했다.
'내 밑으로 다 댓글 달아.' 대구의 모 고교 동문회 총무를 맡고 있는 최창민(가명'40) 씨는 몇 달 전 재미삼아 카스를 시작했지만 이내 후회하고 있다. 얼마 전 동문 선배로부터 뜬금없이 '자기가 올린 글이나 사진에 댓글을 달아라'는 협박성 명령(?)을 받았다. 최근 카스를 시작한 선배가 열심히 사진과 글을 올렸지만 댓글이 별로 달리지 않은 것. 화가 난 선배는 후배들에게 댓글 달기를 요구했고 그 후 최 씨는 '선배님 훌륭하시네요' '참 행복해 보이네요' 등 마음에도 없는 댓글을 달고 때로는 이모티콘으로 아부(?)를 해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카스에 일일이 댓글을 다느라 업무에 지장이 생길 정도다. '딩동', 카스에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는 신호음만 들어도 가슴이 덜컹거린다.
사람들이 굳이 증거 사진까지 제시하며 소소한 자신의 일상을 내보이려는 심리는 무엇일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고 또 인정받고 싶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규원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간은 누구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면서도 "새로 나온 라면을 먹어봤다는 등 깨알 같은 자랑거리라도 드러내려는 인증 문화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누군가로부터의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 "특히 과거 사회는 가문이나 학력, 신분으로 어느 정도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 모바일 시대가 되면서 자기의 정체성, 존재감이 온라인 상에서 확인되길 바라고 있다. 짧은 댓글이라도 다른 사람이 관심을 가져 주는 것에 인정받음을 느끼는 사회가 됐다"고 진단했다.
인증(인정)의 내용도 진화했다. 카스나 미니홈피 초창기. 기존의 인증 사진들은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만을 담은 45도 각도의 얼짱 사진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는 인증(샷)은 희로애락의 순간을 담은 실시간 현장 스케치로 진화했다. 그날 먹은 음식이나 사소한 일상을 찍거나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일정 공개형 인증'이나 유명인사와 친분을 과시하는 나름의 '우정 인증'도 인기다.
◆인정(증)중독
주부 김정미(가명'50) 씨. 카스를 시작했지만 올릴 만한 콘텐츠가 없다. 친구들이 해외여행이나 명품 쇼핑 내용을 자랑삼아 올리면 '멋지네' '부럽네' 하는 댓글만 달다 하루를 소일한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하고 이를 악물어 보지만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김 씨는 현실에서는 인정받는 주부였다. 맏며느리로서 집안 대소사를 챙기며 성실히 살아왔다.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한 번도 아침밥을 굶긴 적 없고 씀씀이 헤픈 남편을 대신해 알뜰살뜰 살아왔다. 두 아들이 대학에 진학한 후부터 좋은 엄마로 인정받는 것에서 존재감을 찾던 그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뒤늦게 모바일상에서라도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마저 쉽지 않다. '내 삶은 뭔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살아온 인생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병원을 찾은 김 씨는 인정중독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인정중독이란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에서 존재감을 찾는 사람들을 말한다. 타인에게 인정을 받을 때 삶 전체가 행복하고 의미있다고 느끼고 인정받지 못하면 자신은 불행하고 살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
김 씨처럼 인정중독 때문에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김양태 계명대 동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최근 들어 인정중독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었다. 예전에는 '빈둥지증후군'을 앓는 중년 여성들이 주로 찾았다면 최근에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남성들도 많다"고 했다.
특히 최근에는 인정중독으로 고통받는 학생들도 늘었다. 김 교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 가운데 인정중독이 많다. 특히 명문대 출신의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의 경우 인정중독에 걸리기 쉽다"고 했다. 공부 잘하고 성격 좋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모범생 중에 인정중독 잠재인자가 많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사람들은 인정중독에 걸리기 쉽다. 이들은 자신에게 가혹한 요구를 하기 때문에 우울증에 잘 걸리고 완벽주의 성향을 보인다. 특히 인정에서 존재감을 찾는 사람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했다.
◆유리알 같은 '인정'
전문가들은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지나칠 경우 우울증과 신경쇠약, 피해망상 등을 동반한 절망감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인정을 받아야 행복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 저당잡힌 인생을 사는 셈. 따라서 인정을 받을 경우 일시적 행복감을 느낄 수는 있어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알 같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인정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인정중독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김양태 교수는 "인정중독 치료는 단시간에 끝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인정중독임을 깨닫고 자신의 자존감을 스스로 찾는 것이 우선이다"고 조언했다.
올해 초 지역의 한 대학에 입학한 김수정(가명'20) 씨. 한때 서울대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명문대를 나온 부모님과 형제들 때문에 자연스레 그런 의식이 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행복한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면서 진짜 공부가 뭔지 알게 됐고 재미를 붙이면서 장학금도 받고 있다. 김 씨는 "남이 정해 놓은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남에게 인정받는 데에서 존재감을 찾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줄 알게 됐다"고 했다.
친구들이 주로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카스도 김 씨에게는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도구'에 불과하다. "여름방학 계획을 세우거나 여행지를 선택할 때 등 고민이 있을 때 SNS를 이용해 글을 올려 댓글로 달린 조언을 참고할 때가 많아요."
김규원 교수는 "카스 등 SNS를 자주 할수록 댓글 등을 통해 많은 관심이 자신에게 쏟아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나르시시즘(자신에게 지나치게 애착하거나 도취되는 현상)에 빠지게 되면 다양한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며 "자아도취 수준이 향상되는 것과 달리 자존감은 오히려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연구결과다. 특히 SNS가 자기 얘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창구가 되기 때문에 이로 인한 쾌감이 극대화된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 충족일 뿐이며 지나친 중독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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