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민족시인·독립운동가 이육사 유일한 혈육 이옥비 여사

엄마 등에 업혀 형무소 앞에서 뵌 아버지…'용수' 쓴 마지막 모습 기

이옥비 여사는 아버지 이육사 시인이 지어준 이름에는 당신이 원했던 삶이 담겨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옥비 여사는 아버지 이육사 시인이 지어준 이름에는 당신이 원했던 삶이 담겨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41년 어느 봄날 아침, 서울 종로구 명륜동. 온 가족이 모인 가운데 아버지는 백일을 맞은 딸의 이름을 공개했다. '옥비'였다. 귀여운 조카의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앞다퉈 나선 형제들의 우애를 정중히 사양한 뒤 며칠을 고민해 직접 골랐다.

그 이름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여자 아이들에게 흔히 붙이는 '구슬 옥(玉)'과 '왕비 비(妃)'가 아니라 '沃非'라 썼다. '윤택하고 기름지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욕심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경계(警戒)였다.

하지만 정작 딸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다정스레 불러주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세 살배기를 남겨둔 채 아버지는 고작 마흔의 나이에 순국했기 때문이다. 민족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陸史'1904~1944)의 유일한 혈육 이옥비(72) 여사의 이야기다.

◆陸史가 남긴 단 한 명의 혈육

따갑게 내리쬐는 7월 땡볕 아래 찾은 '이육사 문학관'(안동 도산면 원천리) 마당에는 청포도 그늘이 우거져 있었다. 하지만 달콤새콤한 맛을 보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할 듯했다. 시인은 분명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라고 노래했건만….

"에이, 아직은 음력 6월이잖아요! 다음 달 말은 돼야 맛보실 수 있을 거예요. 아버지는 양력이 이치에 맞다고 말씀하셨지만 시에서는 음력을 쓰신 것 같아요. 그런데 포도 농사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어 수확할 게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이 포도나무도 말라죽은 걸 뽑아내고 새로 심은 거예요."

이육사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청포도'를 두고는 엇갈리는 주장이 있다. 시에 등장하는 '내 고장'이 어디냐는 논란이다. 이 때문에 안동시와 포항시가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이옥비 여사는 여기에 대해 나름 명쾌한 해석을 내렸다.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포항에서 휴양하신 적이 있대요. 거기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포도밭도 있었다고 하고요. 그래서 시의 배경이 포항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옵니다. 하지만 여기 원촌(遠村'원천리의 옛 이름)에는 옛날에 머루가 참 많았답니다. 지금 드시고 계신 음료수도 제가 머루로 만들었지요. 시에 나오는 흰 돛단배도 동해보다 낙동강에 더 어울리지 않나요?"

이 여사는 육사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생존 혈육이다. 원래는 이 여사 위로 오빠, 언니가 있었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다. 대구에 거주하면서 매년 양력 1월 16일 기제사(忌祭祀)를 모시고 있는 이동박 씨는 양자(養子)로, 육사의 셋째 동생 원창 씨의 아들이다.

육사를 비롯한 6형제들은 무척 우애가 깊었다. 생가의 당호 '육우당'(六友堂)도 형제의 우의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였다. 당초 생가는 육사문학관 시비(詩碑) 자리에 있었지만 안동댐 건설로 안동 태화동으로 이건했다.

"제 오빠는 이름이 동윤이었고, 언니는 서울에서 낳았다고 경영이라 지으셨어요. 하지만 너무 힘들었던 시절이라 일찍 가슴에 묻어야 했어요. 삼촌들이 제 이름을 서로 지어주겠다고 한 일도 그런 연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안동에 온 것도 동박 씨의 건강이 안 좋아 활동하기 힘들기 때문이고요."

◆독립운동가 아버지와 여장부 어머니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인 이옥비 여사의 집안은 대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했다. 이 여사의 증조부 이중직은 경술국치를 맞자 거느렸던 노비를 모두 풀어주고 땅을 나눠준 선각자였고, 백부 원기 씨와 숙부 원일 씨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 강점 이후 비분강개해서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만현, 단식으로 목숨을 끊은 이만도 선생은 집안 어른들이다.

이 여사의 진외가(陳外家'아버지의 외가) 쪽도 범상치않다. 육사의 외조부 허형, 외종조부 허위는 구한말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의병장이었고, 외숙 허규는 육사에게 크게 영향을 끼친 독립운동가였다. 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육사의 어머니(허길)가 아들들의 훈육을 어떻게 했을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다.

"할머니는 한학에 능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낳아준 곳은 친정이지만 나를 가르친 곳은 시댁'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지요. 고부(姑婦) 사이도 아주 돈독해서 할머니 제삿날이면 어머니가 무척 슬퍼하셨어요. 7년이나 냉담하게 지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마지막에 화해시켰던 분도 할머니이셨습니다."

육사가 부인(안일양)을 멀리했던 사연은 집안 내력을 들으면서 이해가 갔다. 이옥비 여사가 전해준 스토리는 이랬다. "큰외삼촌이 아버지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회 동기생이었요. 그런데 하루는 일경에 잡혀가서 고문에 못 이겨선지 동지들의 명단을 토설했고, 독립운동가들이 줄줄이 잡혀갔대요. 그런 외삼촌을 용서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당신의 장인'처삼촌에게 편지를 써서 '비겁한 핏줄과는 함께 살 수 없으니 딸을 데려가시오'라고 했답니다. 외삼촌은 그 후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돌아가실 때까지 제게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어머니도 여러 번 자결하려 했는데 할머니가 말리셔서 겨우 목숨을 이으셨답니다."

독립운동가 남편을 둔 탓에 어머니는 일본 순경에 늘 시달림을 당했지만 여장부였다는 게 이 여사의 회고다. 열다섯에 시집 와서 서른여덟에 청상과부가 됐지만 1984년 작고할 때까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빼어난 바느질 솜씨에다 사업 수완까지 갖춰 어린 딸을 혼자 힘으로 키워냈다.

"아버지가 모두 17번 일제에 붙잡혀 수감생활을 했어요. 담당 순사는 수시로 찾아와 어머니의 뺨까지 때리면서 정보를 캐내려 했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나는 소박데기인데 뭘 알겠느냐'라며 굽히지 않았고, 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 계실 때 '소박데기가 왜 면회왔느냐'고 순사가 면박을 주자 '지아비를 돕는 기본 예의조차 모르는 놈들'이라고 도리어 꾸짖으셨답니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저는 대학 때 친구들과 놀러 한 번 못 가봤어요."

이 대목에서 잠시 목이 멨던 이 여사는 숨을 고른 뒤 담담하게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풀어냈다. "어머니가 13남매의 맏딸이어서인지 무척 엄격하면서도 생활력이 강했어요. 경북대사대부고 근처에서 하숙을 치셨는데 통금 시간을 오후 9시로 정해두고 어기는 학생들은 엄히 나무라셨어요. 제가 결혼할 때까지 대구 중구 삼덕동 88번지에 살았는데 우리 집 별명이 '88여관'이었습니다. 친척들이 시골에서 올라오면 무조건 우리 집으로 왔거든요. 전혀 못 드셨던 술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삼촌들이 권해서 배운 뒤에는 함께 대작할 정도로 잘 드셨어요."

◆아버지 뜻 받들며 고향 지킬 생각

이 여사는 코흘리개 때인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당연히 또렷하게 남아있는 추억은 많지 않다. "아버지가 만주에서 제게 보내신 선물들이 기억나요. 빨간색 벨벳 원피스와 분홍색 모자였어요. 아버지에 대해서는 상아빛 양복, 나비 넥타이와 붙잡혀가실 때 얼굴에 씌웠던 용수가 생각납니다. 아버지가 북경으로 이감된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저를 업고 형무소 앞에 가셨는데 그때 뵌 모습이죠."

이 여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들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육사기념관에 온 이후 언론에 사연이 소개되면서 섭섭하다며 전화를 걸어온 친구'지인들도 많았다.

그가 아버지의 '무게'를 피부로 느낀 건 중'고교 때였다. 육사의 시 '청포도'와 '광야'는 이 여사가 중학교, 고교 때 교과서에 각각 실렸다. "제가 누군지 아는 선생님들이 일부러 시 낭독을 시켰는데 전 몹시 불편했습니다. 선생님들은 시인의 피를 물려받았으니 학교 문예반에 들어가라고도 했지만 저는 일부러 가사반을 선택했어요. 대학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아버지를 넘어설 자신은 없어 제가 발표한 글은 아직 한 편도 없어요."

이 여사는 진한 부정을 느끼며 자라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어렸을 때는 '유명한 시인'독립운동가의 딸이면 뭐 하느냐'는 속앓이도 많이 했다. 남들은 훌륭한 아버지를 둬서 좋겠다며 부러워했지만 정작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놀아주는 아버지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서, 특히 2007년부터 육사문학관을 지키면서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드리게 됐어요. 남들은 평생 살아도 다 못 만날 분들을 저는 안동에 온 지 3년 만에 다 뵐 수 있었어요. 그 게 다 저승에서 아버지가 제게 보내주는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어렸을 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제 이름도 요즘 은행 같은 데 가면 너무 예쁘다고 하는데 그럴 때면 저는 '조상 잘 둔 덕분'이라며 미소 지어요. 당신이 제게 원했던 삶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요."

글'사진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이옥비 여사는

=1941년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났다. 육사가 1944년 1월 베이징에서 옥사한 뒤 영천'대구로 옮겨 대구 동인초교'제일여중'대구여고를 거쳐 지금은 없어진 경북여자초급대학을 졸업했다. 이 여사는 "대구 살 때 이사하는 집마다 경찰서 옆이어서 무척 싫었던 일과 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우다가 어머니한테 '원수의 말을 뭐하러 배우느냐'는 꾸지람을 크게 들은 일이 생각난다"고 회고했다.

1964년 경산 출신 공무원이었던 양진호 씨와 결혼한 이 씨는 서울에서 살다 남편과 사별한 후 일본에 몇 년간 머물렀다. 니가타 총영사관의 사택에서 궁중음식과 꽃꽂이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위암 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버지 역할을 해주던 남편마저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져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며 "브라질에서 선교활동을 할 계획이었는데 김휘동 전 안동시장이 아버지의 진면목을 소개하는 일이 보람 있지 않겠느냐고 해서 문학관을 지키게 됐다"고 소개했다. 이 여사는 슬하에 두 아들과 네 명의 손주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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