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2부-근대의료의 도입 <19>간호의 역사(하)

태평양전쟁 중 전시동원…무시험 간호사 쏟아져

아직 국산 자동차가 보급되기 훨씬 전 미국에서 보내온 앰뷸런스는 구경거리이자 자랑거리였다. 계명대 동산의료원 제공.
아직 국산 자동차가 보급되기 훨씬 전 미국에서 보내온 앰뷸런스는 구경거리이자 자랑거리였다. 계명대 동산의료원 제공.
화상을 입은 소년 환자를 돌보는 동산기독병원의 외국인 간호사. 환자는 세심한 보살핌을 받는 것이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계명대 동산의료원 제공.
화상을 입은 소년 환자를 돌보는 동산기독병원의 외국인 간호사. 환자는 세심한 보살핌을 받는 것이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계명대 동산의료원 제공.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등을 일으켰다. 전쟁은 모든 물자를 부족하게 만들었다. '전시동원체제'가 시작되며 곡물과 쇠붙이를 비롯한 온갖 물품의 강제 공출이 이뤄졌고, 인력도 마구잡이로 뽑아갔다. 의료 인력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학전문학교 교육은 파행으로 치달았고, '군진의료'가 학교에 자리 잡게 됐다.

◆학생 전시동원체제, 간호교육 파행

전쟁이 점차 장기화하면서 간호부도 갈수록 중요한 인력으로 떠올랐다. 어떻게든 간호인력 공급을 늘려야 했다. 공립 간호교육이 확대되고, 간호부 배출 숫자를 늘리기 위해 입학연령도 1942년 15세에서 1944년 13세로 낮아졌다. 지정 간호교육기관은 1914년 제도가 시작된 이래 25년간 10개만 지정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돼 왔다. 그러나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불과 4년 만에 9개가 추가로 지정됐다. 지정 간호교육기관 졸업생은 무시험으로 간호부 자격을 받았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간호교육은 파행으로 이뤄지게 된다. 일제는 '조선간호부규칙'을 개정해 1944년 12월부터 일반교육기관도 간호교육기관으로 지정받게 했다. 결국 불과 반년만인 이듬해 6월 19일까지 68개 학교를 지정했다. 총독부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공립 및 사립 교육기관에 간호과정만 있으면 졸업자에게 간호부 면허를 줬다.

간호과정에 대한 기준은 전혀 정하지 않고 단시일에 가능한 많은 간호부 양산이 지상과제였다. 제대로 된 간호 교육을 포기한 셈이다. 1945년 4월부터 해방까지는 학생들의 전시동원 때문에 그나마 이뤄지던 간호교육 일체가 중단됐다.

선교사들이 일제에 의해 추방됨에 따라 1936년 4월부터 중단됐던 동산기독병원 간호부양성소는 만 4년 만인 1940년 4월부터 다시 시작됐다.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장으로 있던 엘라 샤락스(Ella Sharrocks)가 새로 부임한 것.

한국에서 태어난 샤락스 소장은 대를 이어 선교사로 활동하며 우리말에 능했고, 한국인들과 잘 어울렸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제가 미국을 적성국가로 분류하면서 샤락스 소장마저 강제 추방돼 1941년 11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잠시 간호부양성소를 맡았던 장원용 병원장도 1944년 2월 강제로 사퇴했고, 일본인 나카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간호학생들, 6'25 터지자 징용간호원으로

대구의학전문학교(도립대구의원) 부속 간호부양성소의 입학과정 및 수업에 대해서는 일부 자료만 남아있다. 간호부양성소에 입학하려면 2가지 과정, 즉 무시험과 시험이 있었다. 중학교 4'5학년을 마친 경우는 무시험으로, 중학교 2학년 졸업자는 시험을 쳐서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시험 경쟁률은 15대 1 정도도 상당히 높았다. 수업연한은 2년이었으며, 1942년 당시 도립대구의원 부속 조산부 및 간호부 양성소의 재학생 수는 31명이었다. 모두 전원이 병원 내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광복 후 대구의과대학장 겸 병원장에 임명된 고병간 교수는 1946년 2월 간호과 책임자인 간호부장으로 세브란스간호학교를 졸업한 권석혜를 임명했다. 당시 병원에 있던 간호부 10여 명, 간호견습생 50여 명, 간병인 30여 명 등을 토대로 간호과를 조직했다. 당시 간호과는 병원의 갖가지 물자를 포함한 중앙공급실, 세탁실은 물론 환자식사까지 관리 감독했다.

미군정 기간이던 1947년 6월 10일 '대구의과대학 부속 고등간호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입학자격은 중학교 졸업자였고, 재학 기간은 일반 고등학교처럼 3년이었다. 한편 이때부터 간호부 대신 간호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교육이 이뤄진 것도 잠시뿐이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2, 3학년 학생 대부분이 제3육군병원 징용간호원으로 동원됐다. 이들은 약 9개월 동안 학교 강의를 받지 못한 채 전쟁 부상병 치료에 전념했다.

수업을 못 받았지만 부상병 치료가 간호실습 명목으로 강의를 대신했다. 다행히 이듬해인 1951년 4월부터 동부시립병원(현 범어초교)으로 옮겨져 위탁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1952년 5월 8일에 경북대 창립 무렵 학교로 돌아왔다.

국립 경북대가 생기자 간호학교도 '경북대 의과대학 부속 고등간호학교'로 바뀌었고, 다시 신교육법이 공포되면서 '간호고등기술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간호고등기술학교 입학 경쟁률 약 15~20대 1 정도였다.

◆동산기독병원 간호부, 전쟁 중에도 교육 이어가

동산기독병원 간호부양성소의 입학자격은 1930년대보다 까다로워졌다. 나이 제한도 있었고, 면접과 필기시험에 합격해야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지원자는 오히려 더 늘었다. 이유는 당시 선교사가 세운 간호부양성소에 입학하면 학비가 면제되고, 기숙사와 식사가 제공되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이 공부하기에 유리한 점이 많았기 때문.

간호부양성소가 첫 졸업생을 배출한 1928년부터 고등간호학교로 바뀌기 전인 1946년까지 배출한 졸업생은 모두 64명이다. 그러나 초창기엔 사회적 인식도 부족했고 입학자격에 맞는 학생도 모자랐던 탓에 졸업생은 적었다.

대부분 졸업생은 일제가 간호부 양성에 박차를 가하던 1940년대에 집중된다. 1942년~1946년 졸업생이 45명으로 전체의 70%를 차지한다. 특히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이던 1943년엔 3월과 9월 두 차례 졸업생이 배출되기도 했다.

광복과 더불어 1945년 8월 동산기독병원 간호부양성소 교사로 재직 중이던 유순애가 제5대 소장으로 취임했다. 이어 미군정 보건부는 1948년 간호부양성소를 동산기독병원 부속 간호고등학교로 바꾸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간호고등학교는 병실로 바뀌었고, 대신 교정에 천막을 설치해 교실로 활용했다. 그해 8월 부산 동래에 동산기독병원 분원을 설치해 환자와 기구 등을 옮긴 뒤 간호학생 실습을 이어갔다. 그해 11월 대구로 돌아와 피난 중이던 다른 간호고등학생들에게 편입 기회를 제공했다. 1952년 입학생 선발 경쟁률은 15대 1에 이르렀다.

1952년 세브란스간호부양성소 소장을 역임했던 에드나 로렌스(Edna Lawrence) 선교사가 동산기독병원 간호원장으로 부임해 간호고등학교 교사를 겸했다. 1953년 10월 동산기독병원 간호고등기술학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기숙사를 신축했다. 1958년부터 고교 졸업생을 신입생으로 모집했고, 간호부양성소가 생긴 뒤 이때까지 20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 = 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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