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청바지와 정장

튼튼한 작업복으로 출발한 청바지가 자유를 상징하는 패션 아이콘으로 등극하게 된 시기는 1950년대이다.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말론 브랜도가 '위험한 질주'(1953)에서 청바지와 가죽 재킷 차림으로 출연한 데 이어 제임스 딘이 '이유 없는 반항'(1955)에서, 엘비스 프레슬리가 '제일하우스 록'(Jailhouse Rock'1957)에서 각각 청바지를 입고 출연하면서 청바지는 자유롭고자 하는 젊은이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1960년대 히피 문화와의 결합을 거쳐 1980년대에 들어서 청바지는 자유와 반항이란 '정체성' 보존을 위해 젊은이들에 의해 찢어진다. 롤렉스 시계를 차고 고급 차를 굴리면서 청바지를 입는 '여피족'(yuppies)에 반발해 청바지를 찢어서 입었던 것이다. 청바지에 대한 특권은 세련된 도시 거주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다는 퍼포먼스였다.

청바지가 지닌 자유의 함의는 공산국가 집권자들이 보기에 불온하기 짝이 없었다. 1959년에 처음으로 리바이스 청바지가 모스크바 상점에 전시되면서 불기 시작한 청바지 열풍을 억누르기 위해 소련 사법 당국은 '진 범죄'(Jeans crimes)라는 신종 죄목까지 만들었다. 그 규정은 이러했다. '진으로 만든 의류를 획득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사용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기인한 위법 행위.'

실제로 공산권 젊은이들은 청바지를 얻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사용하고자 했다. 소련에서 서구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유일한 품목인 털모자와 철갑상어알을 청바지와 맞바꾸는 밀수가 성행했다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밀수 청바지는 수요에 턱없이 못 미친 탓에 방수 천, 침대 시트 등으로 만든 대용품도 인기 폭발이었다. 동독의 디자이너였던 앤 카트린 헨델도 이런 대용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녀가 전하는 동독 젊은이들의 반응은 이랬다. "내놓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이 홍명보 감독의 지시에 따라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파주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에 입소했다. 찢어진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사람에겐 자유도 중요하지만 질서와 규율 역시 중요한 덕목이다. 정장은 질서와 규율을 나타내는 옷차림이라 할 수 있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청바지의 찢어진 틈으로 새 나갔을지 모를 정신 자세를 새롭게 다잡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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