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약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향약(鄕藥)으로 불리다가 조선 중기 동의보감이 등장하면서 동의학(東醫學)으로 정립됐다. 그러나 근대에 서양의학과 만나면서 한때 한의학(韓醫學)으로 불렸으며, 광복 후 한의학(漢醫學) 시대를 거쳐 198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한의학(韓醫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의사 이름도 바뀌었다. 1900년 대한제국 시절에 의사규칙이 반포되면서 의료인의 명칭이 의사(醫士)로 바뀌었다가 일제가 1913년 의생규칙을 반포하면서 한의사는 의생(醫生)으로 전락했다. 해방 이후에도 한의사(漢醫師)를 거쳐 한의사(韓醫師)로 자리 잡게 됐다.
◆대한제국 국립병원에선 한의사'양의사 함께 진료
19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조선의 의료체계는 급변하게 된다. 1882년 서민 의료기관인 혜민서와 활인서가 폐지되고, 1885년 서양식 의료기관인 제중원이 들어섰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세우고 운영한 국립병원이었다. 하지만 운영은 쉽지 않았다. 정부가 재정적으로 어려웠고, 제중원 구성원들 사이에 마찰도 잦았다. 결국 1894년 갑오개혁 기간 중에 제중원 운영권은 미국 북장로회로 넘어가고 말았다.
제중원을 대신할 국립병원이 들어선 것은 1899년이었다. 그것이 바로 광제원이다. 처음부터 이름이 광제원은 아니었다. 1899년 4월 내부병원으로 시작한 뒤 1900년 6월 보시원이 됐다가 며칠 뒤 광제원이 됐다.
이에 앞서 전통 의료체계가 무너지면서 동의(양의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한의사를 뜻함)를 위한 시험도 없어지고, 의료인으로서 신분을 보장할 방법도 사라졌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의학교육 및 의사 신분을 정해둘 필요가 있다며 '의학교관제'(1899년)와 '의사규칙'(1900년)을 반포했다. 동서 의학이 만나는 시대적 변화에 스스로 맞춰 나가기 위해 근대적 의료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의사는 양의사와 한의사를 모두 일컫는 말로 차별이 없었다.
그러나 1905년부터 일본의 고문정치가 시작된 뒤 하루가 갈수록 일본인 고문의 내정 간섭은 심해졌고, 급기야 의료행정까지 손을 댔다. 일본은 양의만이 의학이고 의사이며, 동의는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봤다. 동의와 양의가 함께 진료하는 광제원은 일본인들에게 눈엣가시였다. 일본인 고문은 정부병원인 광제원에서 동의사를 제거하기 위해 1906년 4월 갑자기 예고도 없이 광제원 의사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실시했다. 법적인 근거도 없는 시험이었다. 내용은 양의학의 학술시험.
당연히 동의사들은 낙제할 수밖에 없었고, 일제는 이를 빌미로 자격 미달이라며 광제원에서 동의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아울러 광제원을 확장한다며 일본인 의사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매사를 제멋대로 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한의는 점차 몰락
대한제국은 1907년 3월 광제원과 대한국적십자병원, 의학교 및 부속병원을 통폐합해서 대한의원을 공식 개원했다. 이미 이때 광제원에 있던 동의사들은 일제의 계략적인 학술시험에 탈락하는 바람에 단 한 명도 대한의원에 참여하지 못했다. 결국 이때부터 동의는 제도권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민간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로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일제는 조선의 의료제도를 서양의학 중심으로 이끌어 가려고 했다. 제도적으로 동의를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아직 양의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동의를 완전히 없앴다가는 의료체계가 무너질 위험이 컸다.
결국 이를 해결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동의들을 이용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1913년 11월 나온 것이 바로 '의생규칙'이다. 이를 통해 조선의 모든 동의들은 의사라는 이름을 빼앗기고 의생으로 불리게 됐다. 양의는 스승, 동의는 학생이 된 것이다.
비록 의생으로 전락했지만 동의들은 명맥을 유지하고 단합된 힘을 보여주기 위해 1915년 10월 창덕궁 비원에서 전선의생대회(全鮮醫生大會)를 열었고, 여세를 몰아 11월에 전선의회(全鮮醫會)를 조직했고 의학강습도 했다. 물론 이듬해 일제에 의해 모두 해산됐고, 의학강습소도 문을 닫게 됐지만 개인의 사립의학강습소는 남아서 교육을 이어갔다.
그간 동의들은 서양의학에 압도되고 정책적으로도 밀려나 열등감을 버리기 어려웠다. 서양의학을 배우고 따르는 것이 올바른 지식인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차츰 동의학의 우수함을 재인식하고 가치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서양의학은 외과적 수술에는 뛰어나지만 내과 질환 및 만성 질환에는 오히려 동의학이 우수함을 알게 됐다. 아울러 엄청나게 비싼 약값과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고, 양의사를 만나볼 수도 없는 서민들에게는 여전히 동의사는 필수적 의료인이었다.
◆1963년부터 한의사 제도 공식 인정
일제강점기 후반에 이르러 동의에 대한 태도는 조금 바뀌게 된다. 잇따른 전쟁 때문에 많은 군의가 필요했고, 이들을 전쟁에 동원할 경우 후방지역 보건에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의생을 양성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울러 비싼 서양의학 약품이 품귀현상을 일으키고, 한약재의 가치를 인식하면서 한약 재배를 장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의생은 의사가 없는 지역에서 의료 공백을 메워줄 대체인력에 불과했으며, 이런 현상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계속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제헌국회는 국민의료법 제정을 서둘렀다. 그러나 6'25 전쟁이 터지고 정부가 부산으로 피란감에 따라 국민의료법은 1951년 9월 25일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소집된 국회에서 제정됐다. 새 국민의료법에는 한의사(漢醫師)제도가 포함돼 다시 우리나라에 한의사가 제도적으로 자리 잡게 됐고, 한의사회도 창립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한의사 제도 폐지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 의견이 제기됐다. 1961년 5'16 쿠테타 이후 군사정부가 들어선 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결국 국민의료법 중 한의사 제도를 삭제하고, 한의과대학을 폐지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한의계는 한목소리로 강하게 반대했다. 줄기찬 반대운동 끝에 결국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다시 한의사 제도 폐기를 담은 의료법 개정안을 포기하고 1963년 12월 13일에 개정의료법을 공포했다. 벼랑 끝에 몰렸던 한의사제도가 부활한 것이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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