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人 세계In] <4>장정수 볼리비아 올림픽위원회 스포츠 대사

남미의 민간 외교관 "나는 의성 촌놈 한국인이다"

의성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볼리비아로, 볼리비아에서 뉴욕으로, 뉴욕에서 다시 대한민국으로….

장정수 볼리비아 올림픽위원회 스포츠 대사(62'이하 장 대사)가 걸어온 인생 여정이다. 장 대사는 ▷볼리비아 국가대표 유도팀 감독 ▷유도 공인 8단 ▷세계 굴지 금융그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재정 전문가 ▷스포츠 대사 등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가지도 이루기 어려운 것들을 성취할 수 있었던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유도 천재' 의성 소년

장 대사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5월 7일 경상북도 의성군 가음면 현리동에서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의성에서 씨름 잘하기로 소문난 소년이었다. 금성중학교에 다니던 그는 1967년 대구에서 열린 경북도민체육대회에 고교부 씨름 선수로 참가했다. 중학생인데 워낙 씨름을 잘하다 보니 고등학교 씨름부 코치가 그를 출전시킨 것이다.

비록 단체전에서 패배했지만, 도민체전 출전은 그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됐다. 소년 장정수는 가난에서 벗어나 더 크고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어했다. 그는 대구로 향했다. 아는 곳이라고는 씨름대회가 열렸던 영신중학교뿐이었다, 그는 무작정 영신중 유도부 감독을 찾아갔다. "선생님, 이 학교에 다니게 해주이소." "너 뭐 잘 하냐?" "뭐든지 시켜만 보이소." "유도해볼래?"

유도와 만난 장정수는 물 만난 고기 같았다. 유도에 입문한 지 1년 만인 1968년 그는 전국체전에서 중학생부 경북 대표선수로 출전해 개인전'단체전 2관왕을 차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해 국내에서 열린 모든 대회를 석권했고, 서울 동북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재학 3년 동안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볼리비아…제2의 삶

유도 특기생으로 그는 한양대에 진학했다가 복학했다. 어느 날 그에게 유도 후배 한 명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볼리비아로 이민 간 후배였다. 볼리비아에서 국가대표 유도팀 감독을 찾고 있는데 생각이 없느냐는 제의였다. 당시로써는 국내 스포츠인의 해외 진출이 드문 일이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그는 볼리비아행을 택했다.

먼 이국 땅에서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볼리비아는 유도 불모지였다. 그러나 그의 지도 아래 볼리비아 국가 대표팀은 1977~78년 각종 국제대회에서 금'은'동메달을 18개나 따내는 성과를 거둔다. 이어 그는 볼리비아 육군 사관학교와 경찰학교에서 유도를 정규수업으로 채택시켜 생도들에게 유도를 가르쳤다. 그는 볼리비아 사관학교 교실에 태극기를 걸었으며, 대표팀을 가르치면서 항상 태극기를 단 유도복을 입었다. 볼리비아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그는 베네수엘라로 건너가 카라보보 국립대학에서 유도 감독으로 지냈다.

◆성공한 금융전문가

장정수는 안주하지 않았다. 돌연 그는 진로를 바꿨다. 베네수엘라를 떠나 1980년 1월 1일 뉴욕에 도착한 것. 새로움에 대한 도전과 배움에 대한 열정이 그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유도 감독으로 평생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더 넓은 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 고국으로 돌아오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택한 곳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이었습니다."

그는 성공한 금융맨을 목표로 설정했다. 채소'과일가게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고 영어와 실물경제'금융 공부를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금융설계사 자격증 등을 땄고, 세계적인 금융회사인 AXA 에퀴터블 종합금융그룹에 입사했다. 1990년 1월 1일 정식 직원이 된 그는 이 회사에서 고객의 상속 및 재정 등을 컨설팅하고 은퇴 후 설계를 도와주는 전문가로서 22년간 근무했다. 그는 집념이 강했고 끊임없이 도전했다. 그는 "유도 정신이 그 원천"이라고 했다.

그는 2002년 뉴욕 록펠러센터 본사에 마련된 AXA 에퀴터블 종합금융그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안았다. 100만달러 이상 수탁 실적을 올리는 '밀리언 달러 맨'을 10여 차례 유지한 결과에 따른 영예였다. AXA그룹의 전 세계 재정전문가 10만 명 중 매년 10여 명만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다.

◆"나는 한국사람"

볼리비아에서 그에게 유도를 배운 제자들은 지금 그 나라 최고의 엘리트가 되어 있다. 에드가 클라우레 볼리비아 올림픽 위원장도 그 중 한 명이다. 2011년 스승을 볼리비아로 초청한 클라우레는 그에게 스포츠 대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은퇴를 앞둔 장정수는 조국을 위해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수락했다.

"볼리비아는 리튬 매장량 세계 1위 국가입니다. 리튬은 휴대전화, 노트북, 전기자동차 배터리에 꼭 필요한 2차 전지의 주원료이지요. 볼리비아는 자원 외교를 위해 우리가 반드시 손을 잡아야 할 나라입니다."

그의 책상에는 '나는 한국사람이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그는 제9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뉴욕협의회 회장을 지냈으며, 2000년 뉴욕에서 남북통일음악회를 개최했고 해외 최초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여는 등 남북화해 분위기 조성과 한미 우호증진을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다. 뉴욕에서 사업을 하는 그의 큰아들 준원(36) 씨는 "가족끼리 있을 때 아버지는 한국말만 사용하게 하셨다. 어릴 때는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야 깊은 뜻을 알 것 같다"라고 말했다.

2011년 AXA 그룹에서 정년퇴직한 그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고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포부를 실현해나가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06년 이후 7년째 한국을 드나들면서 생활 유도를 무료로 가르치고 있는데, 그에게 지도받은 이들이 전국에 4천여 명에 이른다.

그는 지난 4월 인재 영입 케이스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다.

"저는 'I try best(나는 최선을 다한다)'라는 모토에 따라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을 조국과 고향에 바칠 생각입니다. 그간의 경험과 노하우, 한국'미국'남미를 아우르는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조국에 봉사하고자 합니다."

미국 뉴욕에서 김해용 기자 kimhy@msnet.co.kr

◇장정수 프로필

▷1952년 5월 7일 : 경북 의성에서 태어남

▷의성 가음초교'대구 영신중'서울 동북고 졸업'한양대 체육대 입학

▷1977~78년 : 볼리비아 국가대표 유도팀 감독, 볼리비아 육군'해군'경찰 사관학교 유도 강사

▷1978~79년 : 베네수엘라 카라보보 국립대학 유도 감독

▷1990~2011년 : AXA Equitable 종합금융그룹 재정전문가 재직

▷1999~2001년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뉴욕협의회장

▷2002년 : AXA Equitable 명예의 전당 메달 수상

▷2011년 7월~ : 볼리비아 올림픽위원회 스포츠 대사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으로부터 훈장'표장'공로장 등 15차례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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