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단체나 세계보건기구(WHO) 휘장을 비롯해 앰뷸런스나 구급약 상자에도 자세히 보면 지팡이를 감고 올라가는 뱀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뱀의 마릿수를 두고 의사협회는 오랫동안 고심해 왔는데 도대체 뱀은 무슨 뜻이며 그 수는 왜 문제가 될까?
먼저 '한 마리 뱀'이 지팡이를 둘둘 말며 올라가는 것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라고 한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의술의 신인데, 신화는 이렇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제우스의 번개에 죽은 고린도의 왕을 살리려고 치료하던 중 뱀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놀라서 자신의 지팡이를 휘둘러 그 뱀을 죽였다. 잠시 후 또 한 마리의 뱀이 약초를 물고 들어와 죽은 뱀 위에 올리지 죽었던 뱀이 다시 살아났다. 이것을 본 아스클레피오스가 뱀이 했던 대로 그 약초를 왕의 입에 갖다 대어 그를 살려냈다. 그리고는 감사하는 의미에서 자신의 지팡이를 휘감은 한 마리의 뱀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다음으로 '두 마리 뱀'이 감고 날개까지 달려 있는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있다. 제우스의 아들인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모자와 신발을 신고 두 마리의 뱀이 감고 있는 지팡이를 지녔다. 그는 약삭빨라 남의 물건을 헐값에 사서 비싸게 팔거나 아예 약탈해서 팔아먹기까지 했다. 상인과 도둑의 수호신으로 불리게 됐고, 나아가 죽은 자를 지하로 이끄는 안내자이기도 했다.
이제 각종 의사단체들과 국군의무부대의 표식을 보자. 대부분 두 마리의 뱀이 날개 달린 지팡이를 감고 있어 이것은 영락없는 '헤르메스의 지팡이'다. 여기엔 기막힌 사연이 있다. 18세기 런던에 존 처칠이라는 출판업자가 있었다. 그는 당시 과학 후진국이던 미국으로 보내는 의학서적 표지에 자신의 출판업이 의학과 문학의 결합체가 되길 기원하는 뜻에서 두 마리의 뱀이 감고 올라가는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상징으로 썼다.
하지만 이렇게 깊은 뜻(?)은 대서양을 건너면서 바뀌어 미국인들은 처칠의 의학서적에 찍힌 표식이 의학의 상징이라고 해석했고, 미군 의무부대는 1902년에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휘장으로 채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군정이 한국에 주둔하게 되면서 의무부대는 반짝이는 이 휘장을 군복에 달고 있었고 우리들은 이것을 서양 의학의 상징으로 보았다. 그래서 민간이나 군대나 가릴 것 없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 디자인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군도 엠블럼 교체에 대한 고민을 여전히 안고 있는데, 필자 역시 바로 '의창' 칼럼을 통해 2010년에 문제를 지적했다. 물론 그 때문은 아니겠지만 대한의사협회는 많은 논란 끝에 결국 한 마리의 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로 휘장을 변경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뱀 한 마리를 줄였고, 1947년 조선의학협회가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상징으로 채택한 지 60여 년이 지나서였다.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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