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메일함을 열었더니 잡초처럼 무성히 우거진 스팸메일 사이에 네가 보낸 글이 끼어 있었네. 숨어 핀 들꽃처럼 말이다. 얼마나 반갑던지. 큰 바다 건너 저 먼먼 하늘 아래, 코네티컷주 리버사이드 52번가, 숲 속으로 가만가만 걸어가 너희 집 대문 초인종을 누르는 심정으로 클릭을 하니 아, 네 목소리가 흘러나오더구나. '아빠, 참으로 오랜만에 편지를 쓰네요….' 그래, 네가 글자로 마음을 전해오기는 참 오랜만이 맞구나.
까닭없는 불안으로, 산지사방 뿔뿔이 달아나는 네 마음을 묶어 둘 말뚝을 찾아 헤매다가 문득 생각이 나, 아빠가 썼던 '좋은 생각 행복 편지'를 인터넷에서 차례대로 찾아 읽으며 마음을 추슬렀다니. 그래서 정말 좋고 행복한 생각을 나눈 독자로서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니, 아빠도 오랜만에 네게 큰 위안이라도 준 것처럼 마음이 뿌듯하긴 하다만, 그런데 무슨 일이 네 마음을 생각의 자갈길로 이끌었는지? 걱정이 저만치 앞장서네.
일상 속으로 쳐들어오는, 우울과 불안의 첨병들과 전투를 벌이는 건 누구에게나 힘겨운 일이겠지. 이럴 때 삶의 고수들이 흔히 권하는 전략은, 황사를 일으키며 달려드는 그 우울과 불안의 첨병들한테서 절대로 도망가려 하지 말고 마주 서서 똑바로 바라보기,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기, 심호흡하기, 명상하기, 그냥 걷기…등등일 테지. 그런데 네가 글에서 적었듯이, 이런 교과서적인 전략도 도무지 효력이 없어 에이 모르겠다, 그냥 다 던져버리고 싶은 날. 할 만큼 했는데 안 되잖아요 하며 하나님이나 부처님이나 그 누구한테라도 따지고 싶은 날들. 그래 이런 외롭고 힘든 날들이 누구한테도 왜 없겠냐마는,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도 하나 없는 타국 땅에서 너희 식구를 보듬으며 모든 걸 겪어내야 하는 네겐 그 막막함이 오죽하겠니?
그러고 보니 네가 박 서방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 간지 14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네. 그간 너희는 참 많은 걸 이뤄냈구나. 박 서방이 MBA 과정을 마치면서 곧장 뉴욕 월가에 자리를 잡고, 연이어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철현이를 얻었지. 그리고 그 젖먹이 녀석에게 젖을 물려가며 너는 또 로스쿨 3년 과정을 훌륭하게 마치고 뉴욕주 변호사시험을 통과했잖아. 그리고 둘째 나원이를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또 코네티컷주 변호사 시험까지 거쳤지. 그 숨 쉴 틈 없이 살아 낸 세월 속에서 박 서방은 회사 오너가 되고, 몇 번의 이사로 뉴욕 할렘가 작은 아파트가 숲 속의 대궐 같은 집으로 바뀌고. 너희들이 이뤄 낸 이 모든 성취들이 아빠는 정말 기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그 낯선 땅에서 그처럼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안 마음을 다친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나, 미처 아물지 못한 상처가 왜 없겠나,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더더구나 네 동생까지 그곳으로 불러들여 로스쿨 공부를 잘 마치고 마침표까지 잘 찍도록 뒷바라지해주었잖아. 고맙고도 미안하다.
아빠는 너희들을 믿는다. 너희들이 단 한 순간 단 한 걸음이라도 허욕과 허영을 좇아 남에게 뒤질세라 허둥지둥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몸짓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응원한다. 태산 같은 우리 박 서방과 누구보다 예쁘고 생각 깊은 우리 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단독적인 삶을 꿈꾸는 너희들의 행군을. 다만 이젠 좀 천천히 걸어갔으면 좋겠구나. 감정보다 더 힘이 센 것은 없다더라. 명분과 논리는 감정의 얼굴마담에 불과하며, 그 감정들이 빚어내는 동선과 리듬이 인생이고 운명이래. 매일 매일 감정의 허방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늘 감사하며, 하늘과 땅의 문법에도 눈을 돌려 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법도 넓혀갔으면 한다.
지금도 생각나는구나. 인천 비행장에서 너희들을 떠나보내던 날.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고 탑승객 무리에 섞여 사라지는 네 뒷모습을 물끄러미, 정말 그냥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이. 말이란 게 얼마나 가난하고 하찮은 쪽박이던지. 내가 눈빛 속에 간절히 담아 건네고 싶었던 마음은 세월이 갈수록 더 새록새록 되살아나네. 1, 2년마다 오고 가긴 하지만 곁에 두고 보지 못하니 늘 궁금하고, 그곳에서 날아온 뉴스 속에 작은 사건 사고라도 섞여 있으며 갑자기 너희들 안부가 걱정되고. 네 엄마는 요즘도 길을 가다가 네 자태와 비슷한 네 또래를 보면 괜히 멈춰 서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단다. 그러나 이렇게 간절하게 그리워하며 사는 것 또한 우리의 영혼을 더욱 품격 있게 단련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창밖 가로수에서 매미가 이 여름의 책장이 다 찢어지도록 울어대고 있네. 네 편지를 읽고 나니 오늘은 왠지 애들 엄마나 박 서방의 아내로보다는, 나를 따라 세상에 나온 우리 딸내미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고 싶네. 사'랑'한'다'현'지'야.
김동국/시인 poetkim11@naver.com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