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끗발의 맛'

연대 위병소에서 10개월을 보낸 장 일병은 이미 끗발의 달콤한 맛에 빠져 있었다. 위병은 연대급 부대에서는 헌병과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그런데 다리 관절이 좋지 않아 연대 정훈병으로 전출을 가게 된 것이다. 정훈 부서는 우리 사회로 치면 공보팀이나 홍보팀 같은 부서이다. 근무는 편했지만 끗발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겨우 군가나 틀고 영사기나 돌리는 정훈병의 일과는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끗발에 대한 금단증세까지 느끼면서 재미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뜻밖의 희소식이 찾아왔다. 연대급 부대마다 비디오가 보급되었던 것이다. 비디오 보급은 기존 영상 장비와는 확연히 다른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뭐든 좋은 쪽보다는 나쁜 쪽으로 먼저 머리가 발달하는 법이어서 비디오도 못된 것부터 감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얼마 전에 타계한 에로계의 거성 실비아 크리스텔의 '임마누엘 부인' 정도만 보고도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점점 내성(?)이 생겨 이내 '야동' 본령(本領)의 세계로까지 진출을 하게 된다.

야한 비디오를 볼 수 있다는 소문을 들은 영관급 장교들은 주번을 설 때마다 정훈과 장 상병을 찾았다. 그때마다 장 상병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주번 사령이 보낸 지프에 올랐다. 먼저, 절대 누구한테 이야기를 들었다 발설하면 안 된다고 주지를 시켰다. 그런 다음, 읍내 명다방 김 마담에게 가면 테이프가 많이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 또 그런 걸 볼 땐, 맨정신으로 보면 입이 말라 안 된다며 꼭 족발에 소주 몇 병 정도는 곁들여야 한다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졸지에 정훈과 행정반은 저녁이면 '등급 제한 영화' 상영관이 되고 말았다. 입소문을 전해 들은 취사장 김 하사는 빼돌려놨던 돼지고기로 찌개를 만들어놨다고 연락을 해왔다. 콧대 높던 인사과나 군수과 병사들도 포상휴가나 새 군화를 바치면서까지 입장을 희망했다. 장 상병은 거드름을 잔뜩 피워가며 뇌물의 경중에 따라 엄정(?)하게 입장 순서를 매겼다. 원초적 본능을 볼모로 해서 좀 치사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가 끗발의 맛을 만끽하던 호시절이었다.

흔히 끗발이라 하면 부정적인 면을 떠올리겠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겠다. '끗발은 있는 대로 부려라!'란 군대 금언이 있다. 그 말은 곧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드러내라'란 말과도 통하는 것이다. 때로는 힘겨루기를 하고 때로는 타협을 하면서 실리를 취하는 게 처신의 기본 아니겠는가? 그런데 야동을 많이 본 덕분에 스스로는 상당히 지적(知的)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그렇게 보아주질 않는다. 오히려 퇴폐적 아우라(Aura) 운운하니. 이것 참!

장삼철/삼건물류 대표 jsc10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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