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없는 30평대 아파트, 월급 500만원 이상, 통장 잔고 1억원 이상, 중형차 소유…. 이상이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이다. 그렇다면 영국과 미국의 주요 교육기관들이 제시한 중산층의 기준은 어떠할까? 페어플레이를 할 것,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두둔할 것 등이다.
우리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가 생각하는 중산층 요건이 소위 물질(Material)에 맞춰져 있다면, 서구 선진국들은 정신(Spirit)을 중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약자(弱者)에 대한 배려'가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갑의 횡포 논란 때문일 것이다.
갑과 을이란 용어는 甲(갑), 乙(을), 丙(병), 丁(정) 으로 나가는 열 개의 천간(天干)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앞에 있는 '갑'을 강자(强者), 그 뒤의 '을'을 약자(弱者)로 표현하는 관행이 생겼다. 이것은 계약 행위에서도 이어져, 지위의 우열을 가르는 의미로 변질됐다. 그러다 보니 상호 신뢰와 신의 성실에 기초해야 할 계약이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로 엮이게 됐고, 오늘날 갑을 논란의 시발점이 됐다.
전근대사회를 벗어나면서 신분제는 무너졌지만,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경험하면서 우리 사회에는 새로운 계층이 형성됐다. 그리고 그 계층을 구분하는 중심에는 물질적 부(富)가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차치하고서라도, 상생과 재분배의 개념마저 희미했던 시기, 개인은 중산층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기업은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를 축적해야 했다. 이때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경제주체들의 상당수가 오늘날 갑의 위치에 있을 터다.
갑을 관계의 문제점을 초기 자본주의의 왜곡된 경쟁 문화에서 찾으려는 견해들이 많다. 이제는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바뀌었다. 서로 등을 맞대지 않으면 일어설 수 없고, 고객의 신뢰를 잃으면 회복하기 어려운 시대가 된 것이다. 여기서의 고객은 소비자뿐만 아니라 국가, 국민, 사회, 이해관계자 모두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를 벗지 못한 일부 갑들의 마뜩잖은 행태들이, 지금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게 갑의 잘못이라는 여론몰이에 대해, 항변하는 이들도 있다. 갑의 수난시대라고 하소연한다. 일례를 들자면 이렇다. 협력사가 원청사로부터 공사대금을 받았음에도 경기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면, 협력사 직원들과 이 회사의 이해관계자들까지도 모든 책임을 원청사에 떠넘기려 한다는 것이다. 법적 책임이 아닌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몰아붙이니, 회사 경영은 물론 그동안 공들여 온 기업 이미지 관리에도 어려움이 크다는 것이다.
이들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를 두둔하는 마음과 공생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는 경제성장과 안정을 꾀하기 어렵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선험한 미국과 영국이 '약자에 대한 배려'를 중산층 기준의 하나로 삼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중산층은 나라의 경제성장을 이루는 주축이기 때문이다.
상생과 동반성장을 위해 포스코 패밀리는 부단히 노력해 왔다. 필자가 근무하는 포스코건설은 업계 최초로 협력사와의 동반성장을 위한 전담 부서를 만들었고, 계약서상의 갑, 을 표기를 이미 3년 전에 없앴다. 협력사들의 현금유동성을 고려해 대금 전체를 현금으로 결제해 온 것도 이미 오래전이다. 수년 전부터는 동반성장지원단을 구성해 중소협력사 지원에 나서고 있다. 동반성장지원단은 협력사들에 경영, 기술, 법무, 인사, 노무 등에 대한 맞춤형 컨설팅을 제공해 오고 있다. 또한 그들의 애로사항에 귀를 열고, 협력사 임직원들과의 스킨십을 통해 동반성장, 공동번영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해관계자들에게 존경과 더불어 사랑까지 받는 강자가 있다면, 그가 지닌 물질이나 힘 때문이 아니라 그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회통합과 경제발전을 위해, 갑을 관계는 청산돼야 할 권위주의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대기업들의 역할이 있다. '마음을 깨끗이 하여 앞으로의 근심을 막는다'는 세심방환(洗心防患)의 자세로 모든 경제주체들을 배려하고 공생한다면 갑을 관계는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다.
'전해정' 포스코건설 상무·경영지원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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