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구름 맛 솜사탕 맛

병어 맛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솜사탕 같은 맛

우리는 입속에 닿는 음식의 촉감이 부드럽게 느껴지면 '살살 녹는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그 표현에 가장 근접한 생선이 바로 병어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살살 녹는다. 연하고 달착지근한 게 뼈까지 물러 그 살이 혀끝에 닿는 순간 황홀감에 빠진다. 그래서 병어는 옛사랑의 여인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추억의 생선이다. 병어가 달고 다니는 이른바 '구름 맛' '솜사탕 맛' '살살 녹는 맛' 등은 잃어버린 과거를 기억으로 되살려 보려는 안타깝고 애틋한 몸부림이 빚어낸 표현인 것 같다.

또 있다. 병어의 찬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거문도 출신 소설가 한창훈이 쓴 병어에 관한 이야기는 '가슴을 치는 맛'이 있다. 그의 수필집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를 읽어보면 '병어는 맨 처음으로 돌아오는 맛'이라고 털어놓는다. 그러면 맨 처음은 어디인가. 맨 처음을 본 사람이 있는가. 처음은 또 다른 끝과 연결되어 있어 딱히 어느 것을 맨 처음이라고 해야 하는지 그걸 모르겠다. 어쨌든 맨 처음으로 돌아오는 맛은 맛의 근원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아 대충 이해하고 이쯤에서 넘어가자.

병어는 고급 생선이다. 요즘은 값이 고급과 저급을 가르는 명확한 기준이 된다. 병어는 값도 물론 세지만 지니고 있는 면면이 모두 고급이다. 병어는 깨끗한 사질토의 깊이 10~20m의 깊은 바다에 살다가 초여름 산란기가 되면 얕은 바닷가로 몰려나온다. 먹는 먹이도 모래밭을 좋아하는 새우와 갑각류를 즐겨 먹는다. 진흙밭에 연꽃이 자라는 것은 경이에 가깝지만 고급으로 지칭되는 것들의 대부분이 서식환경과 섭생이 비교적 깨끗한 데서 비롯되고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병어는 공격용 어종이 아닌 방어용 어종이다. 일반적으로 공격용은 튼튼한 이빨과 두꺼운 비늘을 갖고 있다. 그러나 병어는 작은 조개를 깨물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아기 이빨과 비늘이라 말하기엔 부끄러울 정도의 흉내만 낸 비늘을 갖고 있다. 그래서 방어용 어종들의 생태 특징이기도 한 군집 형태로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어족 호적등본에 이름을 올릴 때 병어(兵魚)라고 올린 까닭이 여기서 증명된다.

병어는 맛있는 생선이다. 병어라는 말만 들어도 입안에서 군침이 돌 정도다. 성경에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지만 나의 경우 병어는 구이, 조림, 회 중에 그중에 제일은 회라고 생각한다. 그놈은 성질이 워낙 급해 그물이 몸에 닿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 죽어버린다. 그러니 병어를 건지러 다니는 어부나 운 좋은 갯가 횟집 주인이나 산 병어 맛을 볼 정도다. 그러나 병어는 살이 단단하고 쉽게 부패되지 않기 때문에 선도 좋은 놈을 급랭시키면 사철 싱싱한 살을 맛볼 수 있다.

병어는 뼈가 연하여 웬만한 크기는 뼈째 썰어 먹는다. 살과 뼈, 듀엣의 미학이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용하다. 그리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살점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면 살이 녹으면서 남은 뼈가 사각사각 씹힌다. 고소한 게 묘한 맛을 낸다. 병어의 식감을 지속시키기 위해 초고추장이나 와사비를 제치고 된장을 잘 버무린 쌈장에 찍어 먹는 게 비결이다. 그리고 또 하나 따슨 쌀밥을 지어 쌈장에 찍은 병어회를 올려 먹으면 온과 냉의 궁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6월 초 토요산방 도반 여섯 명이 2박 3일 일정으로 남도 기행에 올랐다. 첫날 마량 어시장에 들러 사흘치 생선회 거리를 아이스박스에 채워 넣고 마지막으로 얼음 속에 묻혀 있는 병어 한 마리를 챙겨 넣었다. 같은 크기라도 어시장에서 하룻밤을 묵은 것은 조림용으로 1만원에, 아침에 들어온 횟감용 싱싱 병어는 1만5천원이다.

숙소에 도착하여 저녁 준비를 하면서 술 한 잔과 병어회를 펼쳐 놓았다. 양은 적은데 젓가락 여섯 개가 왔다갔다하더니 삽시에 바닥이 나고 말았다. 먹성 좋은 도반이 물었다. "한 마리밖에 안 샀어." 대답을 하려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지 눈으로 봐 놓고."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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