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의학의 발달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그러나 끔찍한 비극이 될 수 있다. 운 좋게 정년에 퇴직한다 해도 적어도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한다. 적당한 경제력과 건강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 긴 세월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려야 한다.
돈과 건강을 가졌다고, 가족이 있다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특히 1인 가족'이혼율 증가 등 가족 해체 등으로 믿을 건 친구밖에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가 없다면…. 고독한 인생 말년을 보낼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가족
지난해 무릎관절 수술을 받았던 조선수(75'여) 씨는 최근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일주일에 두세 번씩 마을 공터에서 운동한 덕분이다. 무릎관절 수술을 받은 후 주로 쉴 때는 집에서 누워 있거나 TV를 보며 지냈다. '운동을 하라'는 병원과 가족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혼자서 운동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고 있지만 먹고살기 바쁜 자식 중 누구도 조 씨와 함께 운동을 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나섰다. 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는 몇몇 친구들이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 조 씨와 함께 인근 마을 공터에서 운동을 했다. 친구들의 우정 덕분에 건강을 회복한 조 씨는 이번 여름 자식들이 아닌 친구들과 함께 피서를 떠날 계획이다.
고시에 합격한 뒤 고위공직자로 평생 '갑'으로 살아온 김희수(가명'62) 씨. 현직에 있을 때 고교 동문으로부터 '밥묵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동문모임에도 잘 안 나갔고 어쩌다 옛 친구들을 만나도 '언제 밥한번 묵자'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물론 함께 밥을 먹은 적은 거의 없다. 잘나갔던 그도 퇴직 후 갑자기 인생이 외로워졌다. 항상 남들이 만나자고 하는 약속만 골라서 만날 수 있었지만, 퇴직 후에는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 만나자는 연락 자체가 사라졌다. 동문 모임에 다시 나갈까 고민도 하고 옛 친구들의 연락처를 수소문하기도 했지만 '속 보이는 짓'이란 생각에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동네 산악회에 가입했다. 큰 용기를 내 가입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소중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다. 요즘은 젊은 친구들 만나는 재미에 푹 빠졌다. 20, 30대 친구들과 영화도 보고 연극도 보고 문자메시지 카톡도 교환한다. 뒤늦게 친구의 소중함을 알게 된 그는 철저히 원칙을 세웠다. 갑이 아닌 을의 입장에서 친구를 사귀기로 했다. 젊은 친구들과 만날 때도 자기만의 원칙을 세웠다. ▷스무 살 이상 적은 사람도 언제나 존댓말로 대하기 ▷혼자서 말을 많이 하지 않기 ▷교훈적인 이야기로 감동시키려 들지 말기 등이다.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가며 가끔 젊은 친구들에게는 피자도 쏜다.
요셉성형외과 이영주 원장(49)에게 친구는 또 다른 가족이다. 4년 전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친구들과 함께 야간 산행에 나선다. 모임 이름도 '아이오유(난 네게 (사랑의)빚이 있다)'다. 연인이나 아내에게 사용할 법한 말이지만 그만큼 소중하다는 뜻이란다. 산행을 하며 친구 사귀는 맛에 푹 빠진 그는 마라톤 동호회, 골프 동호회 활동에도 열심이다. "자녀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주말부부여서 외로웠어요. 그동안 술 등으로 외로움을 달랬지만, 지금은 친구들이 함께할 수 있어 외롭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달려와서 의논하고 도와주는 친구들은 이제 내겐 '또 다른 가족'입니다"
◆친구가 '젤' 낫다
재테크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대신 함께할 친구들을 만들고 관리에 적극적인 '우(友)테크'가 필요한 시대다. 대부분 현대인들이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공부 잘하는 법, 돈 버는 법에는 귀를 쫑긋 세웠지만, 친구 사귀는 법은 등한시했다. 그러나 인생 100세 시대를 맞아 '우테크'가 행복하게 사는 전략으로 각광받고 있다.
윤병철 대구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대사회는 가족과 함께 할 기회가 자꾸 사라지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 테두리가 파괴되고 있고 결혼하지 않는 이들도 많고 이혼율 증가 등으로 가족이 해체되기도 한다. 심지어 자식에게 버림받는 노인들도 많이 생기면서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면 적어도 건강만은 챙길 수 있다는 연구결과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가까운 친구가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심지어 가족보다 친구가 더 건강에 이롭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실제 지난해 호주 아들레이드에서 10년에 걸쳐 나이든 어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에서 친구와 만족한 우정은 가까운 가족 간 유대보다 장수 가능성을 높여주고 비만이나 우울증, 심장병 등을 예방한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친구를 찾아 위로받거나 수다를 나눌 경우 옥시토신 호르몬이 나와 마음과 몸을 진정시켜 준다는 것이다.
최창동 가정의학 전문의는 "친한 친구가 많으면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고 타인을 적대시하지 않고 쉽게 화내거나 우울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병에 덜 걸리고 오래 살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반면, "친구가 없다면 우울증 발병이 높아진다. 특히 노인 우울증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노인 우울증 유병률은 30%에 가깝다는 보고가 최근 있었다. 특히 신체적 질병, 만성적 장애, 사회적 고립, 사별, 가난 등이 우울 증상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설명했다.
◆적재적소
친구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SNS 등을 통해 달력을 가득 채워가며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만날 필요는 없다. 친구 사귀는데도 노하우가 필요하고 적재적소에 따른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미국 건강잡지 프리벤션은 최근 소꿉친구, 새로운 친구, 운동친구, 정신적 친구, 젊은 친구 등 다양한 친구를 가질 것을 추천하고 있다. 이들의 용도는 각각 다르다. 소꿉동무는 함께 자라면서 나를 알고 가족을 알고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많은 추억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 꼭 필요한 존재다. 반면, 학교 졸업 후 만나는 새로운 친구는 나에 대한 선입관이 없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나이가 들면서 판에 박힌 생활을 하게 되므로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 그 사람 때문에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운동친구는 친구와 건강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두 마리 토끼'에 해당한다. 노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 이를 친구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일석이조인 셈이다. 특히 좋은 운동친구는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게 해주는 접착제와 같다. 종교 등 정신적 친구도 중요하다. 미국 듀크대학 메디컬 센터의 연구에 따르면 정기적으로 종교행사에 참가하거나 명상, 성경 공부 등에 참여하는 사람은 똑같은 나이와 건강상태의 사람보다 6년 동안 사망 위험이 50%나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무턱대고 '친구 지상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윤병철 교수는 "현대인들에게 자기 혼자 성찰하고 성숙하고 혼자 가질 수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자기 혼자서 잘 견딜 수 있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무엇보다 깊이 있는 친구를 사귈 때만이 진정한 우테크가 가능하다"고 충고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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