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의사(양의사)는 매년 증가했지만 의생(한의사)는 그 반대였다. 의사는 1914년 608명에서 1940년 3천187명으로 늘었다. 의생은 1920년 5천389명에서 1940년 3천604명으로 크게 줄어들어 의사와 비슷한 규모가 됐다. 그러나 농촌과 산간벽지는 여전히 의료사각지대였다. 의사들이 돈 안 되는 농촌지역을 꺼렸기 때문이다. 일제는 1911년부터 정해진 농촌지역에서만 개업할 수 있는 한지의업자(限地醫業者)를 두었다. 한지의업자는 1914년 92명에서 1940년 436명으로 크게 늘었다.
◆천대받던 한약재, 재조명 받아
이처럼 의사가 늘어났지만 인구도 따라서 증가했기 때문에 의료여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조선인 10만 명당 의료인력은 1914년 42.0명에서 1940년 31.6명으로 오히려 줄었다. 1938년 조선 전체 2천384개의 부'읍'면 중 의사가 없는 면이 1천585곳(전체의 66%), 의생조차 없는 곳이 508곳(22%)이나 됐다. 이런 상황을 접한 일제는 크게 당황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한의학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매년 300명에 불과한 서양의사 배출 인원을 더욱 확대해서 의사 공급을 늘릴 수도 있겠지만 일제는 그럴 의지나 여유가 없었다. 조선인들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루 세 끼 챙겨 먹기도 힘든 상황에서 아프다고 한 달 수입을 훌쩍 넘는 병원비를 쓸 수는 없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한의약 활용을 대안으로 떠올렸다. 당시 한의학계는 의생 지위를 높이고, 공식적인 의생교육기관도 설치할 것을 요청했지만 묵살당했다. 대신 조선총독부는 약초 재배를 통해 약재 공급을 늘리려 했다.
그나마 1910년대 일제 강점 초기와는 사뭇 달라진 상황이었다.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약으로 쓴다며 업신여기던 태도가 사라지고, 오히려 약초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에 나섰고, 농촌 주민들에게 약초 재배를 권장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약리학 교수들은 조선의 한약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고, 생약의 가치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도 등장했다.
◆전쟁 확대되면서 한약재도 귀해져
조선총독부는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약 재배를 적극 장려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조선인들에게 의료 혜택을 확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중국산 약재 수입을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일본의 값 비싼 수입 약재를 싸게 대체 공급할 수 있는 재배지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일본에서 수요가 많고, 재배하기 쉬운 약재를 우선 대상으로 삼았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은 한약재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전쟁 탓에 서양 의약품을 구할 수 없었고, 중국산 수입 약재까지 부족한 상황이 벌어졌다. 경성제대 의학부에 한약 강좌를 개설했고, 도청에서는 농민들을 불러 약초 재배법을 실습시키기도 했다. 전쟁 중에 부족한 약을 대신해 생약재를 기르고 채취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내린 셈이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제는 의약품 배급제를 실시했다. 서양 의약품과 한약재 수입이 막히고 전쟁물자 공급이 부족해지자 총독부는 의약품 재고량과 소비량을 조사해 이에 따라 일정량씩 배급하기로 했다. 의약품마저 전시체제로 보급되는 상황에서 일반인들이 필요한 약품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민간에선 한약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쓸 만한 의약품은 모두 전쟁에 공출되는 상황에서 한약재도 부족한 상황이 벌어졌고, 스스로 약을 채취해 써야 했다.
◆한의학에 대한 긍정적 변화
일제는 한의학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갖기 시작했다. 1930년 전염병 환자를 격리시켜 치료하는 경성부립 순화의원에 한방부를 둔 것도 이런 변화의 일환이었다. 한방부에는 총독부 위생과에서 촉탁한 의생 한 명이 치료를 담당했다. 아울러 의생과 한약종상에 대한 교육에서도 변화는 감지된다. 한약재를 거래하는 한약종상은 환자 요구에 따라 한의사의 처방전이나 한의서의 처방대로 한약을 지어주는 사람을 뜻한다. 의료인력이 없던 곳에서 의사 역할을 했다.
도(道) 위생과는 매년 의생과 한약종상을 대상으로 정기 교양강의를 했다. 도립의원 의사가 서양의학을 강의하는 것이었다. 한의학을 무시하고 서양의학만을 유일한 의학으로 인정했던 일제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의생이나 한약종상에게 한의학이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주먹구구식인지 알리고, 서양의학만이 제대로 된 의료임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 초반 이런 방침이 바뀌었다. 1932년 함경북도 위생과장인 나가와(長和)는 "한방의는 한방의로서의 독특한 묘미를 갖고 있는데, 그것을 망각하고 함부로 양의를 모방하라는 까닭에 그 치료가 철저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폐해가 있는 듯하다. 올해는 의법은 서양식을 가르치고, 치료는 한약으로 하는 방법을 가르칠 방침"이라고 했다.
◆한의사를 공적 의료에 포함시키기도
의생 시험문제에 한의학 문제가 포함되기도 했다. 1936년 충청남도 위생과가 주관한 도 의생시험에서 관례를 깨고 한의학 문제가 나왔다. 서양의학과 한의학 절반 비중이었다. 한의학계는 의생을 뽑는데 서양의학 지식만을 묻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해왔는데, 예고도 없이 한의학 문제가 출제되자 오히려 의생시험 응시자들이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의약품이 부족해지자 약초 재배를 장려하는 정책을 쓴 것처럼 의료인력 부족이 심각해지자 일제는 이를 메우기 위해 의생 양성을 공식화했다. 경기도립 의생강습소를 설치한 것. 비록 한시적이지만 의생 교육기관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비교적 대규모로 의생을 교육시키려고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교육은 1937년 4월부터 시작됐다. 한의사가 강의를 맡았고, 도 위생과 의사들은 서양의학을 강의했다. 5년간 의생 300명을 배출했다.
다른 도는 '공의생'(公醫生) 제도를 실시했다. 서양의사 중에도 공의(公醫)가 있었다. 개업할 수 있는 한지의업자와 달리 공의는 관에 소속돼 봉급을 받는 형태였다. 일종의 공중보건의로서 관의 지시에 따라 일을 했다.
일제는 1939년부터 공의 제도와 비슷한 공의생 제도를 시작했다. 그만큼 의료인력이 부족해졌다는 뜻이다. 공의생은 도지사 지시에 따라 전염병의 예방, 종두법 시행, 행려병자 진료, 변사상자 검안, 공중위생 등을 맡았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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