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버스로 그리는 경북스케치] <33>대가야 왕국의 품안을 걷다

동산병원서 606번 탑승…고령읍까지 1시간 15분 '느림의 여유'

청도에서 고령까지 시내버스로 가려면 대구를 경유해야 한다. 청도 운문면에서 동곡리를 거쳐 풍각면으로 돌아와 대구행 0번 버스를 탔다. 시외버스를 타면 손쉬웠을 경로다. 840번을 타고 동산의료원 앞에서 내린 뒤 길을 건너 606번으로 갈아탔다. 서부정류장을 거쳐 고령읍까지 달리는 606번은 매일 10~13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고령읍까지는 1시간 15분가량 걸린다. 고령은 대가야의 숨결이 남아있는 곳이다. 1천500년 전 번영했던 고대 국가의 모습은 베일에 가려 있지만 어스름한 노을빛이 내려앉는 고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거꾸로 되짚는 역사의 자취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달리던 버스가 고령교를 지나 성산면으로 들어섰다. 면소재지를 지나면 1960, 1970년대 험하기로 유명했던 금산재다. 1960년대 금산재는 비포장도로로 지금보다 훨씬 구불구불했다. 당시 100여 명이 탄 시외버스가 금산재를 넘어가다 전복돼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아픈 기억도 있다.

고령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니 뜨거운 햇볕에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다. 이곳에서 천년고찰 반룡사까지는 하루 5차례 버스가 오간다. 20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반룡사 주차장에 내려 50여m를 오르니 아담한 절이 보인다. 신라 애장왕 3년(802년) 헌덕왕의 아들 왕사가 해인사와 함께 창건했다는데 확실하진 않다. 고려시대만 해도 규모가 큰 사찰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탔고, 조선 말에도 화마를 겪었다. 지금 반룡사는 그리 규모가 크지 않다. 그중에서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채 등이 오래된 건물이다. 반룡사 다층석탑과 동종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대가야박물관으로 옮겼다. 절 남쪽에는 부도 5기가 있는데 기단부만 남고 모두 유실됐다. 더 이상 볼 것이 없는데 버스 시간은 3시간이나 남았다. '에라 모르겠다.' 절 입구 정자에 누웠다. 얕은 잠에 한참을 뒤척거리고 일어나 서성거린 뒤에야 버스가 온다.

읍소재지로 들어가기 전, 주산 기슭에 있는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 앞에서 내렸다. 방학에 휴가 기간이 겹친 떼문인지 평일인데도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적지 않았다. 우륵지를 지나 입구에 들어서면 대가야 건국설화의 주인공인 정견모주 동상 아래 음악분수가 물을 뿜는다. 길을 따라 올라가면 대가야 입체 영상관과 고대 가옥촌, 가마터 체험관 등이 있다. 특히 여름에만 개장하는 물놀이장 주변은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다. 더 오르면 미로처럼 돼 있는 탐방숲길과 가마터 체험관, 캠핑장, 가야광장 등도 있다. 어른들의 눈으로 볼만한 건 별로 없다.

◆대가야의 비밀을 따라 걷는 길

대가야역사테마관광지를 건너면 본격적인 대가야 유적 탐방 코스가 시작된다. 먼저 둘러볼 곳은 대가야박물관과 대가야왕릉전시관이다. 박물관에는 대가야와 고령 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석기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문화 유적들을 전시했다. 화려한 대가야의 금동관과 투구, 다양한 토기들에 눈길이 간다. 입장권을 사면 대가야박물관과 왕릉전시관, 우륵박물관까지 모두 관람할 수 있다.

박물관 옆으로 경사길을 오르면 봉분 모양으로 둥글게 지은 왕릉전시관이 나타난다.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리 44호분의 내부를 실물 크기로 재현한 곳이다. 지산동 44호 고분은 국내 최초로 확인된 순장묘다. 돌방이 2개 있고 주변에 순장자들의 무덤 32기가 있다. 내부를 한 바퀴 돌면서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순장자들의 매장 모습, 부장품들의 종류와 성격도 확인할 수 있다.

왕릉전시관 왼쪽으로 나무계단을 올랐다. 가야 지역 최대 고분군인 지산동 고분군이다. 오르막이 꽤 급하지만 힘에 부칠 정도는 아니다. 가야의 고분들은 산 능선을 따라 들어선 점이 특징이다. 무자비한 도굴로 인해 남아있는 유적이 많진 않지만 봉긋봉긋 솟은 왕릉이 산등을 타고 쭉 이어진다. 왕릉 아래로 너른 평야에 자리 잡은 고령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분군을 지나면 대가야의 수도를 지키는 최후의 거점이었던 주산산성이다. 성의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성의 일부였던 돌무지들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돌무지 위는 복원 공사를 위해 덮어둔 상태. 숲길을 따라 산허리를 돌면 산림욕장 약수터가 나타난다. 맑은 약수로 목을 축이고 가던 길을 재촉하니 주산 산림욕장 입구다. 이곳에서 주산 정상이나 반룡사와 미숭산까지 8㎞ 길이의 등산로를 탈 수 있다. 충혼탑을 지나 계속 내려오면 고령학생체육관이 나오고 삼거리에서 고령향교 뒤편으로 들어간다. 향교 주변에는 너른 잔디밭과 '대가야국성지'라고 쓰인 석조물이 있다. 그저 빈터로 남은 이곳이 대가야의 왕궁터다. 고령향교 입구 계단으로 내려오니 느티나무 그늘에 더위를 피하는 주민들이 눈에 띄었다. 곧장 내려와 중앙네거리를 지나면 고령시외버스터미널이다.

◆1천 번의 손길 끝에 탄생하는 가야금

대가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장소는 우륵박물관이다. 우륵박물관까지 하루 6차례 버스가 오간다. 차로는 10분도 걸리지 않지만 걷기에는 만만치 않은 거리다. 쾌빈교를 건너 좌회전을 하니 이내 도착이다. 이곳은 우륵이 가야 말기 중국의 쟁을 본떠 12현금인 가야금을 만들고 연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박물관에는 우륵의 생애와 가야금의 기원에 대한 영상물과 가야금, 아쟁, 해금 등 전통 현악기들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 바로 옆에는 가야금 공방인 우륵국악기연구원이 있다. 공방 안에서 김동환(46)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 이수자가 명주를 얼레에 묶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천장에 매단 실패 예닐곱 개에서 명주실이 바닥에 있는 얼레로 내려와 있다. 김 이수자가 손으로 세차게 얼레를 돌려 실을 감았다. 명주를 쪄서 말리고 풀어서 얼레에 엮은 뒤 다시 꼬아 현을 만든다.

가야금은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난다. 200여 개의 공정이 필요하고, 1천여 번의 손길이 간다. 특히 울림통의 재료인 오동나무를 말리는 데만 5년이 걸린다. 바닥판과 안족, 좌단 등 부분에 사용되는 밤나무와 호두나무, 장미나무 등 다른 종류도 2, 3년은 말려야 한다. 가야금은 수령이 30년 이상된 오동나무를 둥글게 깎아 말리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나무를 건조할 때도 둥근 형태가 유지되도록 계속 뒤집고 손을 봐야 한다. 제대로 마른 오동나무는 울림통으로 쓰는데 안쪽을 깎아 소리를 잡고 인두로 지져 나뭇결을 살린다. 좌단과 현침을 붙여 몸통이 완성되면 줄을 달고 안족을 올린다. 안족과 줄, 울림통이 제대로 맞아야 좋은 소리가 난다. 정확한 소리를 내는 12현의 굵기가 모두 달라 작업이 까다롭다.

김 이수자가 가야금 제작에 뛰어든 건 1988년부터다. "처음에는 대팻날을 가는 것부터 시작을 했죠. 날을 갈고 작은 부속을 만드는 데만 3년이 걸렸어요. 이후부터 바닥판, 현침, 봉미 등을 배워나갔죠.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 되려면 15~20년은 배워야 합니다." 그가 건조장에 세워둔 오동나무판을 들고 두드렸다. 통통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가야금이 될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같은 나무 안에서도 소리가 좋은 부위가 있어요. 나무의 성질이 가장 중요하죠. 수령이 50년이 넘은 오동나무라도 '작품'이 될 만한 건 10% 정도에 불과해요." 장인에게 '만족'이란 늘 어렵고 힘든 과정을 동반하는 법이다.

글'사진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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