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아주까리 등불'의 가수 최병호(상)

굵고 느릿한 음성, 시대 정서 담긴 노래 구성지게 불러

최병호(崔炳浩, 1916∼1994)란 이름은 몰라도 옛 가요 '아주까리 등불'을 모르는 이는 아마 드물 것입니다. 지금 아흔 가까운 노구에 여전히 '전국노래자랑' 진행자로 활동하는 송해(宋海) 씨가 이 노래를 즐겨 불러서 더욱 많이 알려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노래를 맨 처음 불러서 음반을 내고 자신의 대표곡으로 만들었던 가수가 바로 최병호입니다.

최병호는 전남 무안에서 출생했습니다. 본명은 최재련(崔載鍊), 자신의 가수 명을 한자만 바꾸어서 병호(丙浩), 혹은 병호(丙虎)로 쓰기도 했습니다. 소년 시절, 목포에서 거주할 때 선배였던 작곡가 이봉룡(李鳳龍, 1914∼1987)으로부터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고 자신감을 키우며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1940년, 그의 나이 24세에 제1회 오케(OKEH) 가요콩쿠르대회에 참가해서 광주예선을 통과하고, 서울본선에서 박달자, 권명성, 신석봉, 성일, 봉일 등과 함께 선발되어 전속가수가 되었습니다. 그해 8월에 첫 데뷔음반을 내었는데, 그 제목은 이봉룡이 작곡한 '십 년이 하룻밤'입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1년 2월에 '아주까리 등불'과 '실없는 동백꽃' 등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이 발매되었는 데, 뜻밖에도 놀라운 히트를 하게 되었지요. 그 화제의 중심은 바로 '아주까리 등불' 때문입니다.

피리를 불어주마 울지 마라 아가야/ 산 너머 고개 너머 까치가 운다/ 고향 길 구십 리에 어머니를 잃고서/ 네 울면 저녁별이 숨어버린다

노래를 불러주마 울지 마라 아가야/ 울다가 잠이 들면 엄마를 본다/ 물방아 빙글빙글 돌아가는 고향 길/ 날리는 갈대꽃이 너를 부른다

방울을 울려주마 울지 마라 아가야/ 엄마는 돈을 벌러 서울로 갔다/ 바람에 깜빡이는 아주까리 등잔불/ 저 멀리 개울 건너 들길을 간다

시인이자 유명 작사가였던 조명암(趙鳴岩, 1913∼1993)이 노랫말을 붙이고 역시 고향 선배 이봉룡이 작곡을 한 작품입니다. 이 가요 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엄마를 잃고 슬피 울고 있는 한 아기의 불쌍한 모습이 보입니다. 아기가 울면서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리는 엄마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우는 아기의 옆에서는 까치가 깍깍하는 소리로 달래주고, 저녁별도 아기를 위로하는 듯 깜빡입니다. 누군가가 자장가를 불러주기도 하고, 바람에 날리는 갈대꽃이 아기를 토닥여주기도 합니다. 줄곧 그치지 않는 아가 울음을 달래주는 방울 소리도 들리네요. 오죽하면 슬픈 소식을 알리지 못하고 엄마가 잠시 돈 벌러 위해 서울 갔는데, 오실 때는 틀림없이 맛있는 과자를 사올 거라며 짐짓 거짓말도 해봅니다. 하지만 칭얼대는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슬프고 아름다운 시대적 정서를 느끼게 합니다. 세상을 떠난 아기엄마는 다름 아닌 주권을 잃어버린 조국의 상징입니다. 우는 아기는 고통에 시달리는 우리 민족의 표상이 아니겠습니까. 이렇듯 애절한 정감이 서린 노래를 최병호는 그 특유의 굵고 느릿느릿한 보이스컬러로 구성지게도 펼쳐서 엮어갑니다. 이 가요곡을 사랑하는 많은 팬들은 라디오나 전축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혼자 눈물을 짓거나 가슴이 울컥하는 비통함에 잠길 때가 있었습니다.

작사가 조명암도 가사를 잘 썼지만, 그 분위기를 살려내는 곡조를 작곡가 이봉룡이 워낙 잘 뽑아내었고, 더불어 이 좋은 악곡의 맛을 제대로 살려낸 주인공이 바로 가수 최병호였던 것입니다. 작사, 작곡, 가창 세 박자가 절묘한 삼위일체를 이룰 때 비로소 한 편의 절창이 탄생할 수 있다는 원리를 이 노래는 보여주었습니다. 가수 최병호의 활동터전은 거의 대부분 오케레코드사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불과 두 해 남짓한 기간 동안 대략 스무 곡 가까운 가요작품을 집중적으로 발표했습니다.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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