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메디시티 대구 의료 100년] 제3부-전통의학의 변화 <4>전통의학의 정신 계승한 대구경

1951년 한의사 제도 통과…지역 명의들 '동양의약'에 기록

대구와 경북은 예로부터 한약 생산 및 유통지로 이름을 떨쳤고, 한의학을 발전시켰으며, 유의(儒醫)들의 산실이었다. 지역 한의사들은 일제강점기 민족 독립을 위해 의열단, 대동청년단 등의 활동을 치열하게 펼쳤다. 특히 약령시인 대구 약전골목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지사들의 치료실이며 사랑방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실린 한의계 역사 및 인물에 대한 내용은 대구시한의사회와 마산 성신한의원 황연규 원장의 기록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의술로 이름 떨친 집안 많아

유의(儒醫)는 유학자로서 의학지식을 갖추었으면서 의술을 업으로 삼지 않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문과 출신으로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의료행정을 겸했으며, 왕실에 질환이 있을 때 다른 의관과 함께 진료하기도 했다.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의학을 연구해서 의서 편찬에 참여했다. 이 밖에 양반 가문의 자제로 의학을 배우는 습독관(習讀官), 전의감'혜민서에서 의학교수관으로 의학교육과 연구에 힘쓰는 사람들도 유의라고 불렀다.

이들은 의술을 펼쳐 생계를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영남지역에는 이런 유의들이 대대로 명맥을 이어왔으며, 안동과 상주 등지의 유학자 집안에도 이름난 의사들이 많았다.

고종황제 시절 전의(조선 후기 궁내부 태의원에 속해 왕실 진료를 맡던 관직)로는 이규영, 서병효, 홍재호가 있다. 경북 안동 출신의 서병효는 1907년에 시종원 전의장(정3품)이 됐으며, 1925년까지 전의로 활동했다. 1900년 한성의학강습소를 열고 1910년에 동의학 강사로 임명됐으며, 일제강점기 전국의생대회 강술사로 활동했다. 경북 개령군(현 김천시 개령면) 출신인 취암 홍재호는 전선의회 평의원이며 사립의학강습소 학감, 동서의학연구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했다.

◆유의 명맥 이어온 대구

대한제국 시절에도 대구에 유의가 있었다. 석곡 이규준과 지산 이교섭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 한의학 부흥을 위해 노력했던 이들 중에 조선의생회 부회장을 했던 대치 서병림은 대구를 대표하는 한의사로 꼽힌다.

해방 후 민족 내 이념 대립이 심각하던 시절, 월강 김관제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이며 민족의 아픔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꼽힌다.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으며, 지역의 독립운동가로서 대동청년단, 의열단 등에서 활동했다.

매일신문에 실린 '정영진의 대구이야기' 중 해방 직후의 상황을 묘사한 한 대목을 살펴보자. "감옥에서 풀려난 좌경적인 항일투사들은 맨 먼저 약전골목의 제일예배당 건너편 복양당(復陽堂) 한약방에 모였다. 이들은 기미만세사건 직후 의열단(義烈團)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 집 주인인 월강 김관제를 중심으로 경북건국준비위원회라는 간판을 걸고, 따르는 청년들을 앞세워 '치안대'를 조직했다. 과도기의 치안공백을 틈타 날뛰는 좀도둑과 파렴치범들을 잡는다는 명분이었다."

한편 일제강점기 대구 약전골목은 연인원 17만 명이 몰려들고 약제 184만 근(1939년 통계)이 거래되던 곳이었다. 한의학 탄압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대구지역 의생(한의사)만이 비록 한시적이지만 유일하게 인원이 늘었다고 한다.

◆한의학 부흥에 앞장선 조헌영

일제가 국권을 찬탈한 뒤 '의생'의 지위로 격하됐던 한의사들은 6'25전쟁이 터진 뒤 임시정부에서 드디어 제대로 된 정식 지위를 얻게 됐다. 1951년 9월 25일 임시 수도인 부산에서 국회가 소집돼 한의사 제도가 통과된 것.

이 과정에서 한의계 인물들의 활동이 주효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해산 조헌영이 있다. 경북 영양군 일원면 주곡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조부는 의병대장 조승기이고, 그의 아들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다. 경북고와 와세다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신간회 도쿄지부장과 신간회 사무간사, 신간회 중앙검사위원회 상무위원을 한 독립운동가였다.

조헌영은 '동양의약'의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근대 한의학을 개척하고 한의학 기초 수립에 노력했다. '동양의약'은 1935년 한의사 단체인 동서의학연구회(東西醫學硏究會)에서 간행한 한의학 학술잡지다. 조헌영은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서고, 한의학의 특성과 우월성 등에 대해서도 집필했다.

해방 이후 1949년 10월 12일 대구 동양의학강습회 창설 등 한의학 부흥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1대와 2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6'25전쟁 발발 후 피란하지 않고 있다가 납북됐고, 북한에서 한의학 연구에 계속 심혈을 기울여 의학박사(동의학 박사)를 취득했으며, 1988년 5월 23일 평양에서 사망했다.

◆한의 전통 계승한 실력자들 즐비해

유림 가문 출신의 소정 최해종도 지역의 대표적인 한의사 중 한 명이다. 부친은 통정대부(조선시대 정삼품 문관에게 주던 품계) 일화 최현달이다. 최현달은 청도군수로 있던 중 일본의 강제 합방에 항거해 최익현처럼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노모의 만류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평생 칩거하며 살았다.

이런 이유로 가세는 기울었지만 최해종은 1914년 대구한의사회 회장인 지산 이교섭과 고종의 전의였던 서병효를 스승으로 한의학을 배웠다. 그의 문학적 스승은 유명한 석재 서병오였다.

해방 후 한의사제도의 탄생과 함께 제1회 한의사국가고시에 합격한 뒤 자해한의원을 열어 한의사로 활동했고, 경북대구한의사회 회장과 대한한의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두 차례 국가고시 시험위원으로 위촉됐다. 1949년 동양의학 강습소 강사로 활동했으며, 조헌영'서상일과 함께 '한의학 부흥운동'에 참여하는 등 한의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동양의약'에는 당대에 유명했던 지역 한의사들의 기록이 남아있다. '경북한의학계의 원로-최해종' '우리나라 한의학의 현대화를 위해 탁월한 의치적 연구와 실력 향상에 노력과 학계의 조직을 발전시키기 노력한 분-정현곤' '국제 의학화할 때까지 노력하는 투지가-여원현' '난치병 완치와 싸우는 한의학자-정규만' '은연한 의공을 세우며 신치료에 체계를 구상하는 분-이종필' '경북 영주군 태생으로 한의학 공부-지우삼' '선친의 인술을 계승한 임상의 실력가-권세형' 등이 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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