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쪽풀의 나들이

'쾅!' 양철지붕이 갈라질 듯 요란한 소리가 났습니다. 살평상 위에 앉아 바람을 쫓듯이 부채질을 하던 중년 남자가 화들짝 몸을 움츠리며 소리를 칩니다.

"아이고 놀라라! 이게 무슨 소리고?"

그런데 주인장은 "돈이다! 돈 떨어지는 소리데이"라며 검붉게 탄 얼굴에 환한 미소를 그립니다. 평상 옆 옹기 속에 든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내 동료들의 여린 모가지를 낱낱이 잘라 담벼락 그늘 아래 은근슬쩍 말리는가 하면, 내 푸른 잎을 따다 물독 속에 차곡차곡 담가 사나흘씩이나 가두어 삭히지를 않나…. 그러면서도 내 앞에서 주인은 제 색깔이 나오지 않는다며 나를 타박할 뿐 한 번도 돈이 된다는 칭찬을 해주질 않습니다.

한 해살이 풀, 파랑의 천연염재로 쓰이는 쪽(藍)인 나는 설익어 떨어지는 땡감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그만 옹기를 박차고 집을 나섭니다. 맘 내키는 대로 걸음을 옮겨 온 산천을 누빕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말갛습니다. 푸르름으로 넘실거리는 들녘을 지나 파란 물결이 출렁거리는 연못 둑에 이르렀습니다. 호소는 청푸른 하늘을 가득 담고 종이배 같은 작은 구름 조각들을 띄우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모두 나를 닮은 색깔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로부터 한 걸음씩 진화해 나가려는 색깔들의 행진이 분주합니다.

나는 색의 바탕이 된다는 자긍심에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색감 인식능력이 발전되고 있지만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이나 청백적흑황의 오방색(五方色)의 근본을 외면할 수는 없지요. 그 바탕 위에 190여 가지의 많은 색차가 만들어진답니다. 후진국에 비하여 선진국의 색깔 취향이 훨씬 다양하고 색차의 범위 또한 넓습니다.

내친김에 나는 가까운 산사로 발길을 옮겼어요. 전각의 기둥과 대들보는 물론 포심과 서까래의 겉에 붉음과 파랑을 선명하게 교차시켜 강렬하고도 단순한 원색미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으니까요. 나는 단청으로 채색한 기둥 앞에서 우리의 민화와 근대 유럽화단에 밝은 색감을 전도케 한 우키요에 목판화의 파랑색을 떠올립니다. 반 고흐가 탐미했던 강렬하고도 매혹적인 색깔입니다. 19세기 후반에 유행한 유럽의 인상주의 화풍을 눈여겨보세요. 얼마나 화려하던가요. 그런데 그 하나로 관통하는 근본이 단청의 조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네 조상들이 추구한 일상의 미감은 그야말로 단청의 범위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이미 초가을 볕이 살짝 끼어든 시골집 마당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흙 담장 아래 불그레한 꽈리풀이 익어갑니다. 마당에는 빨간 고추가 햇살에 달고 있습니다. 여태 더위를 이기지 못한 명주잠자리 떼가 마당 가를 나직이 맴돌고 있습니다. 나도 그만 늦더위를 먹을 것아 집으로 되오려는데 붉은 듯 노오란 색깔이 나의 눈길을 끌어당깁니다. 마른 치자꾸러미가 처마 자락에 금줄처럼 대롱거리듯 매달려 있었습니다. 노랑물감의 염재로 사용해온 것이지요. 붉은 물을 우려내던 소목이나 꼭두서니 혹은 홍화꽃도 만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친구가 되련만 하면서 발길을 돌립니다.

서서히 나의 노여움도 묽어지기 시작합니다. 나들이에서 만난, 나를 받쳐주는 여러 색깔이 내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역시 청출어람(靑出於藍)이야!' 하면서 은근히 자위해 봅니다. 청이 남을 잊고서야 어디 청의 존재를 말할 수 있으리오. 청이 더 푸르고 더 화려하다 하되 남을 부정하고 남의 기반 힘을 거절한다면야 어디 청의 새푸름을 상찬할 수 있으리오. 나는 새롭게 변화하고 싶은 간절한 꿈을 버리지 않습니다.

말복이 갓 지났습니다. 더위도 한 차례 물러서려나 봅니다. 시리도록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조금 수그러든 듯합니다. 무성한 호박넝쿨에 제 몸을 송두리째 감춘 토담 밑, 그 그늘진 자리가 내가 자란 곳입니다. 채소밭처럼 몇 이랑 일궈, 나를 채소처럼 여겨주는 주인에게 넌지시 웃음을 지어 보입니다. 무한한 진화를 꿈꾸는 나의 남빛 미소를요.

김정식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 gangsan3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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