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이다. 빛이 이 땅에 다시 비친 지 벌써 68년이다. 매년 맞는 광복절이지만 올해 광복절은 동아시아를 덮친 여름 폭염만큼이나 뜨겁다. 일본 아베 정권이 과거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고 정상적인 국가 재건이라는 미명하에 또다시 역사와 진실을 거스르는 폭주(暴走)의 광기를 드러내고 있어서다.
오늘은 바다 건너 일본의 '종전기념일'이기도 하다. 무모하게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가 나라 전체가 불바다가 되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날을 종전기념일이라고 부르는 데서 일본인들의 엇나간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무조건 항복하고도 패전만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복잡한 일본의 속내가 종전기념일이라는 기이한 명칭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러니 '일본이 미국에는 졌지만 중국과 한국에 진 것이 아니다'는 망상이 잉태하는 것이다.
주지하듯 일본인의 천박한 역사 인식의 중심에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위안부 문제, 전범기인 욱일기가 있다. 위안부 문제가 추악한 과거사를 부정하고 '아름다운 나라 일본'을 미화하려는 천연덕스러운 위선이라면 야스쿠니와 욱일기 문제는 전쟁 책임을 부인하는 일본 정치권과 우익, 이에 동조하는 많은 일본 국민들의 국수주의의 진원지라는 점에서 더 심각하게 봐야 할 문제다. 야스쿠니의 본질은 또 다른 전쟁에서 일본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사상적 장치인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일본 전문가이자 지일파인 제럴드 커티스 컬럼비아대 교수는 "일본에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목에 걸린 가시"라고 했다. 넘길 수도 없고 뱉으려 해도 목에 걸려 잘 빠지지 않는 처지라는 표현이다. 야스쿠니 참배가 일본의 정치'사회적 부담이 되고 있다는 것은 이방인의 해석일 뿐 정작 그들의 본심은 다르다. 겉으로는 근대화 이후 일본 국가 정신의 본향이자 국민감정이 짙게 녹아든 야스쿠니의 입장도 이해해 달라는 말로 포장하지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을 추모한다는데 웬 참견이라는 게 진짜 속내다. 그런 자기 연민이 도를 넘어 이제 아베 정권과 일본 국민이 그 가시를 삼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야스쿠니가 일본의 걸림돌이 될 것임을 예견한 사람이 있다.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이다. 그는 일본 동양경제신보사 발행인 출신의 정치가로 1950년대 후반 자민당 총재와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 직후 그는 신문 사설에서 야스쿠니 신사 폐지를 주창하면서 야스쿠니 문제를 방치하면 원한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우려에도 일본은 1978년 A급 전범 14명을 야스쿠니에 합사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다.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이 메이지 유신 몇 해 전인 1865년 세계여행길에 올라 일본에서 받은 인상을 적은 여행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공예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일본은 높은 문명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도덕 관념은 저급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일본인의 가식은 사회 관습처럼 굳어버렸고 정치'행정 제도 전반에 걸쳐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나쁜 관습이라고 하기에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 그때의 일본과 지금의 일본이 다른가.
일본인들은 입만 떼면 한국이 일본인의 입장을 이해해 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우리 감정이 이러니 그냥 이해해 달라는 것이다. 이제껏 일본이 한국과 중국의 입장을 이해하고 행동했는지 되묻고 싶다. 이는 2천만 아시아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전쟁마저도 이해하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나치에 동조한 독일 국민이 그렇듯 일본 국민 대다수가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하고 기꺼이 전쟁에 뛰어들었으며 '죽어서 야스쿠니에서 만나자'고 다짐했다. 일왕을 위해 죽을지언정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정의와 박애, 평화에는 침묵했다. 이런 감정이 굳어져 지금도 역사의 진실을 덮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든 않든 그들의 문제다. 많은 일본인이 "언제까지 사과하라는 말이냐"고 투덜대지만 우리도 입 아프게 사과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더 중한 것은 야스쿠니와 위안부, 욱일기 뒤에 감춰진 일본의 가면을 하나둘씩 벗겨 내는 일이다. 세계가 일본에 대한 허상에서 깨어나도록 힘쓰는 것이야말로 진정 광복절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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